1869년(고종 6) 정상리의 손자 정선우(鄭善愚)가 편찬하고, 1873년 재종질 정민병(鄭民秉)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유후조(柳厚祚)의 서문, 권말에 정민병의 후지(後識)가 있다.
8권 4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권1∼3에 시와 만사 358수, 권4·5에 소(疏) 1편, 서(書) 47편, 잡저 12편, 권6·7에 서(序) 6편, 기(記) 8편, 제발(題跋) 7편, 상량문 2편, 고유문 3편, 제문 25편, 권8에 행록 5편, 묘지명 7편, 행장 6편, 부록인 행장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에는 경전·예설에 관한 문답이 있다. 특히 사간 김정원(金鼎元)에게 보낸 글에는 암암리에 민간 깊숙이 파고들고 있는 천주교 세력의 팽배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 내용이 있다.
「서애선생신묘청주환재아계비변(西厓先生辛卯請奏幻載鵝溪碑辨)」은 1591년(선조 24) 일본 통신사인 황윤길(黃允吉)이 가져 온 국서의 내용 중에 중국을 치겠다는 구절이 있음을 명나라에 알려야 한다고 한 사람은 유성룡(柳成龍)인데, 뒤에 채제공(蔡濟恭)이 이산해(李山海)의 비문을 쓰면서 명나라에 알리자고 한 사람이 이산해라고 기록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 글이다. 「병산서원청액소(屛山書院請額疏)」는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임금을 호종하면서 왜적 토멸에 큰 공을 세운 유성룡 부자가 제향된 병산서원에 사액을 주청한 글로, 유성룡이 국가와 학문에 이바지한 공로를 자세히 적고 있다.
「심설(心說)」은 성리설에서 마음의 본체는 명덕(明德)이 되고 형체로 말하면 방촌(方寸)이 되어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적자심과 대인심 등이 되는 때와 곳을 설명하고, 위치와 변화의 시기를 밝힌 글이다. 「감여설변(堪輿說辨)」에서는 지리에 대한 말이 유교의 경전에 나오지 않으니 선비가 말할 것이 못 되나 그것으로 부모를 후하게 장사지낼 수 있으면 다행한 일이라 하고, 그러나 길흉설은 신빙할 것이 못 된다고 설명하면서 이순풍(李淳風)과 곽경순(郭景純)의 지리설을 부정하였다.
이 밖에 『가례』에 명문 규정이 없는 것을 설명한 「부재모상담복의(父在母喪禫服儀)」와 자신의 취미와 사상을 밝힌 「엽동거사자서(燁洞居士自敍)」가 있고, 젊은 학도들에게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한 「도남서원강학소통문(道南書院講學所通文)」과 「송암서원강회통문(松巖書院講會通文)」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