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근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형조정랑, 평창군수,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회보(懷甫)
소옹(梳翁)
이칭
한흥군(漢興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47년(명종 2)
사망 연도
1629년(인조 7)
본관
한양(漢陽)
주요 관직
동지중추부사|평창군수
관련 사건
인조반정|임진왜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형조정랑, 평창군수,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회보(懷甫), 호는 소옹(梳翁). 아버지는 전한 조덕원(趙德源)이며, 어머니는 현감 유이(柳頤)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으로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피난하여, 그 신주를 개성목청전(穆淸殿)에 임시로 봉안해 두었다가 영변에 봉안하게 하였다.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대소조(大小朝)로 나누자, 이에 대한 여러가지 미비점을 상주하여 마침내 분조(分朝)의 체면을 갖추게 하였다. 1601년 옥천군수, 1605년 형조정랑에 이어 다음해 평창군수를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앞서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에 녹훈되고, 한흥군(漢興君)에 봉하여졌다. 폐모론이 일어나자 병을 핑계하여 양근(楊根)에 돌아가 치사를 청하였고,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 때의 훈작(勳爵)을 모두 삭적(削籍)함에 따라 삭훈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묘사의 신주를 모신 공로가 참작되어 1627년(인조 5)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