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회보(懷甫), 호는 소옹(梳翁). 아버지는 전한 조덕원(趙德源)이며, 어머니는 현감 유이(柳頤)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으로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피난하여, 그 신주를 개성목청전(穆淸殿)에 임시로 봉안해 두었다가 영변에 봉안하게 하였다.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대소조(大小朝)로 나누자, 이에 대한 여러가지 미비점을 상주하여 마침내 분조(分朝)의 체면을 갖추게 하였다. 1601년 옥천군수, 1605년 형조정랑에 이어 다음해 평창군수를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앞서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에 녹훈되고, 한흥군(漢興君)에 봉하여졌다. 폐모론이 일어나자 병을 핑계하여 양근(楊根)에 돌아가 치사를 청하였고,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 때의 훈작(勳爵)을 모두 삭적(削籍)함에 따라 삭훈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묘사의 신주를 모신 공로가 참작되어 1627년(인조 5)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