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수보(遂甫). 인천부사 조현기(趙顯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정서(趙正緖)이고, 아버지는 문헌공(文憲公) 조명리(趙明履)이며, 어머니는 홍우석(洪禹錫)의 딸이다. 부인은 교리를 지낸 이존중(李存中)의 딸이다. 조명진(趙明震)에게 입양되었다.
1763년(영조 39) 증광문과에서 뽑힌 53인 중 장원을 하여 영조가 손수 지은 사언(四言) 한 구(句)가 하사되었다. 그뒤 삼가현령(三嘉縣令)으로 파견되었다가 곧 승지로 발탁되었고, 1764년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영조의 뜻을 거스린 소를 올렸다가 파직당하였다.
그 뒤 1766년 승지에, 이듬해에는 대사간에 다시 제수되었다가 1768년 좌승지로 옮겨 익릉(翼陵) 기신제(忌辰祭)의 공으로 호피(虎皮)가 하사되었다. 1772년(영조 48) 대사간으로 재직 중 구상(具庠)을 탄핵하는 소를 올려 삭직당하였다가 복직하였다.
이듬해 승지·대사간을 거쳐 1774년에는 등준과(登俊科)에 뽑혔고, 창방(唱榜)에 장원하여 우윤(右尹)으로 승진한 뒤 이듬해 대사헌에 올랐으나 숙배(肅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진도군(珍島郡)에 찬배(竄配)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정조가 즉위한 뒤 벽파인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윤양후(尹養厚) 등과 일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삭출(削黜)되었다가 1782년(정조 6)에 사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