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택지(擇之). 조지유(趙之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상우(趙相禹)이고, 아버지는 장령을 지낸 조이병(趙爾炳)이다. 어머니는 지성연(池性淵)의 딸이다.
1693년(숙종 19)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일찍 관직에 나가 1708년(숙종 34) 황해도 신계현령(新溪縣令)으로 재직 시 선정으로 포상을 받았다. 그 뒤 1710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고, 1712년 장령(掌令)을 제수받았다. 이듬해 정언(正言)으로 재직시 헌납(獻納) 홍중휴(洪重休)의 상소를 문제삼아 탄핵하였다. 1714년 사서(司書)·필선(弼善)을 거쳐, 이듬해에는 장령으로 제수되었다.
이어 헌납·장령으로 옮겼으나 1716년 잠시 체직되었으며 이듬해 장령으로 복직되었다. 이어 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대론(臺論:사헌부·사간원의 공론)의 문제로 체차(遞差: 관직이 교체되면서 강등됨)되어 세자시강원의 보덕(輔德)의 일을 맡았다가 사간으로 복직하였다. 1718년에는 학가(鶴駕) 영송시 칭병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또 다시 체차되었다가 복직되었다.
이어 집의에 제수되었다가 한달 뒤 승지에 올랐으나, 이듬해 관소(館所)의 배종(陪從)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체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경종이 즉위하자 병조참지(兵曹參知),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그 뒤 안변부사로 나갔다가 경종 즉위시 고묘(告廟:국가나 왕실에 큰 일이 있을 때 그 사실을 宗廟에 고하거나 여쭘)를 저지한 노론의 영수 김창집(金昌集)과의 친분으로 탄핵되어 사판(仕版: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병조참지에 제수되었으며, 1726년(영조 2)에는 감시(監試)의 시관(試官)으로 활약했다. 그 후 삭출(削黜)당한 부제학 정호(鄭澔)를 비호하다 파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