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창(淳昌). 자는 명중(明仲). 조성구(趙聖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이려(趙爾呂)이고, 아버지는 조태하(趙泰夏)이며, 어머니는 박상형(朴相馨)의 딸이다.
1714년(숙종 4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5년(영조 1) 장령(掌令)으로 재직 중 삼사 관원들과 복합(伏閤)하여 조태구(趙泰耉)·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의 주벌(誅伐)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며, 또 목민업무를 소홀히 한 하동부사(河東府使) 신경필(申慶弼)과 온양군수(溫陽郡守) 권흥준(權興駿)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과거와 인재 등용에 관한 상소로 영조의 신임을 얻었다. 이어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동지정사(冬至正使) 서평군(西平君) 요(橈), 부사(副使) 김유경(金有慶)과 함께 연경으로 갔다가 이듬해 7월에 돌아와 준청(準請)의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되었고, 이어 승지에 제수되었다.
1727년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재직시 수찬 이양신(李亮臣)이 탄핵소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1730년에는 재차 승지로 제수되었고, 1735년부터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파견되어 목민업무를 수행하다 1740년(영조 16) 대사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