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숙함(叔涵). 마전군수 조시형(趙時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인천부사 조현기(趙顯期)이고, 아버지는 정언 조정위(趙正緯)이며, 어머니는 민정기(閔挺杞)의 딸이다.
1721년(경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1725년(영조 1) 설서(說書)·검열(檢閱), 이듬해 겸설서·설서를 거쳐 지평이 되어서는 충신과 역적를 구분하고 사치와 음주를 경계하라는 소를 올렸고, 홍문록(弘文錄)의 권점을 받았다.
1727년 문학(文學)·정언(正言)을 거쳐 부교리(副校理)로 재직하다 정미환국(丁未換局)의 여파로 삭탈관작당하였고, 1729년송인명(宋寅明)의 천거로 재등용되어, 수찬(修撰)·지제교(知提敎)·정언·교리를 역임했다. 이 후 1731년에는 부안현감(扶安縣監)으로 재직 중 참혹한 흉년의 상황과 곤궁한 백성들의 황급한 형세를 잘 극복하여 명망을 얻었다.
이듬해 경직으로 복귀하여 부수찬·부교리·이조좌랑·헌납·부응교·집의·사간을 두루 거쳤다. 1734년에는 교리를 거쳐 응교 재직 중 언로(言路)를 열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고, 이듬해 별겸춘추(別兼春秋)·사간·겸보덕(兼輔德)·응교를 거쳐 1737년에 승지에 제수되었다. 그 뒤 1739년에 대사간에 올랐고, 1744년 형조참판을 거쳐 이듬해에 대사헌직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