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거주지는 원주(原州). 1891년(고종 28) 증광시(增廣試)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1887년(고종 24) 홍문관수찬으로 임명되었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그 우두머리를 극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95년 부교리·장례원주사(掌禮院主事)에 올랐다.
같은 해 10월 12일 왕실근신인 이재순(李載純)과 임최수(林㝡洙)·이도철(李道徹)·이민굉(李敏宏)·안경수(安駉壽)·김재풍(金在豐)·이충구(李忠求)·이세진(李世鎭) 및 일부 양인(洋人)까지 포함하여 합작모의하였다.
이들은 시해당한 명성황후에 대한 복수와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을 타도하고 정부를 개조하여 시국을 수습하고자, 병사를 모아 궁궐을 공격하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켰다.
이 사건에 전응교로서 관련되었으나 범행이 피동적이며 경미하다 하여 석방되었다. 1896년 하동군수·강릉부참서관을 거쳐 1897년 김제군수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