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자휴(子休). 장령 조속(趙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인화가 조지운(趙之耘)이고, 아버지는 조형보(趙衡輔)이고, 어머니는 임일유(林一儒)의 딸이다.
사마시 생원과를 거쳐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였다. 1728년(영조 4) 정언(正言)을 거쳐, 이듬해 지평(持平)으로 재직 중 태학(太學)의 재임(齋任)을 모두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라는 명이 있자 인피(引避)하였고, 그 뒤 지제교(知製敎)에 선발되었다가 이어 재차 정언(正言)·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그 뒤 부수찬·교리·지평·부수찬 등을 거쳤다. 1734년 수찬 때에는 성균관 유생이 경전에 밝지 못한 폐단을 논하여 강서 시험을 치른 뒤에 입학을 허락할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 1736년 수찬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에는 교리(校理)·응교(應敎)를 거쳐 사간으로 재직시 흉년으로 과거를 미루도록 하였다.
이듬해 겸필선(兼弼善)·장령·사간·승지를 거쳐 1740년 대사간에 올랐다. 1746년 대사간으로 재직시 이조참판 심성희(沈聖希)의 인사행정이 고르지 못하다는 논핵을 한 뒤 사실(私室)에서 사죄하였다는 이유로 장령 홍득후(洪得厚)의 탄핵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