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회경제사』는 경제학자 백남운이 한국의 고대 경제사를 체계적으로 서술하여 1933년에 간행한 학술서이다. A5판. 462쪽으로 일본어로 간행하였다.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방대한 한국사를 서술하기 위한 일환으로, 원시사회부터 삼국통일 이전 신라까지 한국의 고대경제사를 우리나라 최초로 서술했다. 저자는 방대한 사료를 분석하여 세계사적 발전 과정과 일치하는 한국사의 체계를 모색하였다. 당시까지의 역사 서술이 왕조 중심이거나 정치사 중심의 관념 사관인 데 반하여, 피지배계급에 역사의 초점을 맞춤으로써 한국사회경제사연구의 효시가 되었다.
A5판. 462쪽. 1933년 동경의 가이조사(改造社)에서 일본어로 간행하였다. 저자가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방대한 한국사를 서술하기 위한 일환으로, 원시사회부터 삼국통일 이전 신라까지 한국의 고대경제사를 우리나라 최초로 서술한 것이다.
이 책은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적 상황에 영향을 받아 저자가 세계사적인 보편적 역사발전의 법칙이라고 생각한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을 한국사에 적용시키고자 한 것이다. 지은이는 우리나라의 역사도 원시공산사회-노예사회-봉건사회-자본주의사회라는 보편적 역사발전의 단계를 거쳐왔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을 기초로 하여 이 책에서는 원시시대부터 통일 이전 신라까지를 원시 및 노예제의 시기로 분석했으며, 1937년 이 책의 속권으로 역시 가이조사에서 간행한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朝鮮封建社會經濟史)』 상(上)에서는 통일신라와 고려를 봉건사회로 규정하였다.
이 책은 크게 서론 · 본론 · 총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과 총결론에서 기존의 조선경제사 연구방법론과 단군신화를 비판했으며, 또 당시까지 지배적이던 왕조중심의 역사서술태도의 편협성을 비판하고, 동시에 일제관학자(日帝官學者)의 식민사관과 민족주의자의 민족주의사관(民族主義史觀)도 특수사관이라고 배척하였다.
이전의 조선사는 왕조를 중심으로 정치적 권력의 외부적 규정 및 흥망성쇠를 다룬 왕조변혁사, 군신(君臣)의 언행록 내지 전제정부(專制政府)의 일기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당시 후쿠다(福田德三)가 최초로 주장하고 조선총독부에 부설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를 중심으로 행해지던 한국사에서의 봉건제결여론(封建制缺如論)과 여기에서 비롯된 정체성이론 및 타율성이론은 일제침략을 합리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서, 인류 사회발전의 역사적 법칙의 공통점을 거부하는 점에서 반동적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일제관학자들에 대항하여 등장한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申采浩)와 최남선(崔南善)의 단군신화론은 원시 씨족공동체 내지 민족 형성의 역사 관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비역사적인 견해라고 비판하였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정체성이론이나 특수성이론을 비판한 뒤, 그 대안으로 유물사관의 일원론적 발전법칙을 제시하였다.
지은이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한 과학적 역사방법론이었고, 일제하의 위압적 특수성에서 벗어나 세계사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본론에서 원시씨족사회, 원시부족국가의 제형태, 노예국가시대 등 3편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제1편의 원시씨족사회에서는 씨족사회에 관한 학설, 조선 친족제도의 용어, 조선의 가족형태, 성씨제(姓氏制), 원시조선의 생산 형태, 원시씨족공동체를 분석하면서 한국의 고대사회가 마르크스 역사이론에서 말하는 원시사회와 일치함을 이론적으로 설명하였다.
제2편의 원시부족국가의 제형태에서는 삼한 · 부여 · 고구려 · 동옥저 · 예맥 · 읍루의 가족과 부족형태 및 부족동맹형태, 생산력과 사유재산의 발달에 따른 계급의 발생과 종족노예의 등장 등을 소개하였다.
여기에서 기원전 2세기 전후의 원시공산사회 말기인 삼한시대에 국가성립으로 이르는 과도기적 단계로서 원시부족국가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원시부족국가는 부족연맹체로 구성된 사회로서, 집단적 소유에 기초한 종족노예제(種族奴:下戶 · 部曲民 등)가 대체적으로 일반화되고, 이 종족노예제는 정복전쟁에 의한 노예의 양적 증대를 배경으로 개인적 소유에 기초한 일반적 노예제로 발전하여 노예국가로 나아가는 길을 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3편의 노예국가시대에서는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노예제도의 발달과 노예제도의 편제, 토지제도와 경제생활의 계급상, 생산력 일반, 이데올로기 일반 등을 다루면서 노예국가의 성립을 다루고, 삼국시대를 노예사회로 규정하였다. 그 논거는 당시의 주된 생산계급이 노예라는 것이다.
이 노예제사회는 왕족 · 귀족 · 지방호족 · 일반 농민 · 노예라는 형태의 계급구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노예는 주로 왕족과 귀족계급이 소유하고, 그들은 토지국유의 원칙 아래 왕족 · 귀족에게 하사된 토지를 경작하였다고 보았다.
한편, 일반 농민은 토지점유자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소작인으로서 가혹하게 수탈당하는 존재로서 사회적 노동의 주체는 아니었고, 노예노동이 양적 · 질적으로 일반 농민의 노동을 상회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에 자연발생적인 대토지사유제의 전개의 특권 획득에 따른 소유지의 장원화(莊園化)가 진전되면서, 노예와 일반 농민의 농노화가 진전되어 봉건제도의 이행이 준비되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 서서 한국사회의 정체성이론이나 특수성이론을 부정하고 지양하였다는 데에서 사학사적(史學史的)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유물사관의 정식(定式)을 한국사에 적용하여 전인미답의 신천지에서 『삼국사기』 · 『고려사』 · 『고려사절요』 등 방대한 사료를 분석하여 세계사적 발전과정과 일치하는 한국사의 체계를 모색하였다는 점에 커다란 의의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지은이의 연구가 조선시대까지 미치지 못했으나, 이 책은 그 이후 한국경제사연구의 초석으로 작용하였다. 동시에 이 연구는 많은 취약점도 보여주었다. 우선, 여기에서 체계화라는 것은 한국사의 구체적 연구에서 도출된 귀납적 결론이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 대한 연구에서 추출된 이념형을 일방적 · 기계적으로 한국사에 적용하였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노출되었다.
또한, 하부구조를 토지국유제로 보고 역사발전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영유와 국유의 반복 범주를 내세웠으나, 국유 자체가 중앙집권제의 속성이라고 봄으로써 상부구조의 구실을 오히려 중시한 방법론상의 오류를 범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상정한 노예사회는 고전고대적 노예사회로서 사회적 생산면에서 노예에 의한 생산이 질적 · 양적으로 우세하다고 보았으나, 우리나라의 역사과정에서 노예노동이 사회적 생산에서 주류를 이룬 시기는 없었다.
그 밖에 개념 사용이나 논리 전개에서 부정확성이나 자의성을 보였다. 이와 같은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한국사연구에 미친 공헌은 지대하다. 그의 저서는 한국사를 과학적으로 서술하려는 최초의 노력으로서, 역사가 단순한 사실(史實)의 나열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이론적 · 실증적 양면에서 최초로 시대 구분을 시도하였다.
또한, 일제하의 한국사연구에 있어서 한국사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주장과, 심지어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같이 한국사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사상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당시까지의 역사 서술이 왕조 중심이거나 정치사 중심의 관념 사관인데 반하여, 피지배계급에 역사의 초점을 맞춤으로서 한국사회경제사연구의 효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