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1일 왕익권(王益權)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공산당에서 사용하는 ‘동무’라는 용어를 강령에까지 표현할 정도로 급진적이었는데 강령은 다음과 같다.
“강제학병제도로 인하여 사선(死線)을 넘은 동무들의 친목을 도모하며 견고한 단결을 위하여, ① 제국주의 세력을 철저히 구축(驅逐)하여 민족해방의 완전을 기함, ② 신조선 건설의 추진력이 될 것, ③ 신조선문화운동에 진력할 것, ④ 현 과도기에 있어서 치안유지에 협력하고 장차 국군창설에 노력할 것임.”이다.
간부를 보면, 위원장에 왕익권, 부위원장에 이청영(李靑榮), 총무는 이형화(李亨華) 외 6명, 기획은 이준오(李濬五) 외 6명, 문화는 박혁(朴赫) 외 5명, 선전은 고인권(高仁權) 외 4명, 경리는 김근배(金根培) 외 5명, 실천은 박진동(朴晉東) 외에 3명으로 구성되었다.
조선학병동맹은 일제치하에서 학병에 끌려나가던 굴욕의 날인 1월 20일을 학병기념일로 정하고, 전국학병대회의 개최와 희생당한 학병들의 추도제와 같은 행사를 거행하기 위하여 각 도별로 학병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낸 사건은 학병동맹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46년 1월 16일에 반탁전국학생총연맹(反託全國學生總聯盟)이 주최한 반탁성토대회(反託聲討大會) 후에 시작된 학생들의 가두시위에 대하여 조선학병동맹 단원들이 계획적인 테러행위를 가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