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창(淳昌). 자는 사정(士靜), 호는 만한(晩閑). 조흔(趙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정현(趙廷顯)이고, 아버지는 조직(趙稷)이며, 어머니는 유성룡(柳成龍)의 딸이다.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이듬해 세마(洗馬)가 되었다.
찰방으로 오른 뒤 1633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언을 거쳐, 1635년 평안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와 다시 정언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扈從)했으며, 인조가 다시 강화도로 가려고 할 때 채유후(蔡裕後)와 더불어 적에게 발견될 위험이 있다 하여 이를 만류하였다.
최명길(崔鳴吉) 등이 주화론을 제창하자 끝까지 싸울 것을 삼사와 더불어 극간했으며, 이듬해 헌납을 거쳐 이조좌랑·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638년에는 이조정랑에 올랐으며, 이후 다시 언관직으로 돌아와 응교·집의·사간을 지냈다.
1645년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사은 겸 주청사(謝恩兼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연경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를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경직(京職)으로 복귀하여 대사간·부제학·대사성 등을 지낸 뒤 1651년(효종 2)에는 이조참의로서 『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다시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어 대사성·대사헌·이조참판·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호조참판을 지내고 이듬해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이 때 예론(禮論)이 일어나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본격화하자 남인인 권시(權諰)와 조경(趙絅)을 비호하는 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
1663년 병조참판으로 전임되었으나, 남인의 실세(失勢)를 보고 스스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다시 한성부우윤으로 재기용되었고, 형조·예조참판, 한성부좌윤을 역임한 뒤 1674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