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창(淳昌). 자는 여보(汝輔). 조성구(趙聖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이정(趙爾鼎)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조태흥(趙泰興)이며, 어머니는 홍주천(洪柱天)의 딸이다.
1710년(숙종 36)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5년 지평(持平)에 제수되었고, 1717년 정언(正言)·문학(文學)을 거쳐 이듬해에는 필선(弼善)으로 재직 중 정사(政事)를 맡은 세자의 명으로 호남지방의 궁민(窮民) 사정을 들러보고 구휼에 노력하였다.
이듬해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어 군정(軍政)을 바로잡고, 조정을 바로잡는 상소로 세자의 신임을 얻어 헌납(獻納)에 제수되었다가 이어 사간(司諫)에 올랐다. 1719년 양역(良役)을 변통(變通)하기 어려움을 논하고, 팔로(八路)의 승도(僧徒)에게 베를 거두어 포흠(逋欠: 관의 물품을 사사로이 사용함)에 보충하기를 청하였다.
이 해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집의(執義)를 예겸하였다. 그 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 당시 화를 입었다가 영조가 즉위하자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에 임명된 후 승지에 올라 소론의 영수 조태구(趙泰耉)의 죄를 논한 예문관검열 신노(申魯)를 탄핵하여 대립하였다.
이어 밀양부사(密陽府使)로 파견되어 목민업무에 노력하였고, 1728년(영조 4) 청주목사(淸州牧使) 재직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백성을 편안히 이끈 공적으로 이듬해 숙마(熟馬)가 사급(賜給)되었고, 또 1730년 승지에 제수된 뒤 동지(同知)로 승진하였다가,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호조참판·병조참판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