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공양왕 4) 이방원(李芳遠)의 명으로 조영규(趙英珪) 등과 함께 정몽주(鄭夢周)를 격살한 뒤 그 해 이성계를 추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한산백(漢山伯)에 봉했졌다. 1394년(태조 3)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서 강계등처도병마사(江界等處都兵馬使)를 겸임하고, 1397년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봉해졌다. 이방원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판중추원사 · 의흥삼군부중군동지절제사(義興三軍府中軍同知節制使)를 거쳐 참찬문하부사에 승진하였다.
1400년(정종 2) 도독중외제군사도진무(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로 병권을 장악,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봉해졌다. 사병 혁파가 실시될 때 이를 거부하고 무기를 수납하는 군관을 구타했다가 황주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부윤으로 나갔다. 그 뒤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 권행의정부사(權行議政府事) ·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를 거쳐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로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하였다.
1405년 우정승에 올랐으며, 이듬해 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를 겸직한 뒤 1408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1409년 훈련관도제조(訓鍊觀都提調)를 지내고, 영삼군부사(領三軍府事)가 되어 병으로 사직하였다. 1412년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된 박영우(朴英祐)의 위임거부로 물의가 일어나자 추천한 장본인으로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우정승에 복직되었다. 죽은 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