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복 초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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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작품
조선 후기의 화가 조영석(趙榮祏,1672-1728)이 그린 조영복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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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의 화가 조영석(趙榮祏,1672-1728)이 그린 조영복의 초상화.
내용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54㎝, 가로 80㎝. 199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경기도박물관 소장. 조영복은 조영석의 맏형으로 1725년(영조 1) 조영석 나이 40세에 54세의 조영복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화면 오른쪽 위에 조영석이 쓴 관지(款識: 글자 따위를 음각한 것과 양각한 것을 아울러 이르는 말)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것은 나의 백씨인 이지당부군(二知堂府君)조영복의 54세 초상이다. 갑진년(1724년)에 영석이 영춘(永春)의 유배지에서 부군을 뵙고 처음 초를 잡은 뒤, 다음 해 을사년(1725년)에 부군께서 조정으로 돌아오셨을 때 약간 손질을 가하였으며, 화사 진재해(秦再奚, 1691∼1769년)를 시켜 따로 공복본(公服本)을 그리게 하고, 영석은 이 그림을 그렸다. 숭정 기원 후 두 번 임자년(1732년) 7월 정미일에 동생 영석 삼가 쓰다.

(此我伯氏二知堂府君五十四歲眞像也 昔在甲辰榮祏拜府君於永春謫中 始出草 明年乙巳 及府君還朝 略加潤色 命畵師秦再奚別作公服本 榮祏寫此本云 崇禎紀元後再壬子七月丁未 弟榮祏謹書.)”

이 관지에 기록되어 있는 진재해의 공복본이 종가에 함께 전하다가 지금은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영석이 그린 조영복 초상화는 영조가 이 초상화를 보고 감동하여 조영석을 세조 어진 중모(重模)의 제작에 참여하도록 결정하였다 한다. 그만큼 당시에도 인정을 받았던 작품이다. 그러나 이때 조영석은 기술로서 임금을 섬기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는 명분으로 거부하여 사대부가에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이 초상은 좌안칠분(左顔七分)의 각도에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흰 사방건에 연거복(燕居服)을 입었는데, 이는 경종의 국상에 따른 애도의 표시로 추정된다. 얼굴의 경우 전신(傳神: 그려진 사람의 얼과 마음을 느끼도록 그리는 일)의 표현이 살아있고 주름을 선묘(線描: 선으로만 그림)로 그렸다. 그리고 그 주변을 훈염법(暈染法)으로 처리하여 입체감을 내었다. 이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선호된 양식으로 선묘법에서 훈염법으로 전이하는 과도기적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옷을 표현을 보면 굵은 선으로 윤곽을 정의하고 그 안의 주름은 보다 옅고 가는 선으로 묘사하였다. 여린 듯하면서 힘이 내재되어 있는 선묘에서는 작가의 개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초상화는 공복이 아닌 연거복 형식의 자유로움이 특징적이다. 약간 오른쪽으로 틀어 미묘한 각도를 이룬 몸의 자세와 옷의 펑퍼짐한 외관에서 그러한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더욱이 가슴에 홍세조대(紅細條帶)를 매고 거기에 부채를 걸어 이루어진 선의 흐름은 자연스럽고 무릎에 가만히 얹은 손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어떤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자세와 자연스러우면서도 사실적인 표현에서 기교를 뛰어넘는 아취를 느낄 수 있다.

참고문헌

「관아재조영석화학고(觀我齋趙榮祏畵學考) 하」(강관식, 『미술자료』 45, 국립중앙박물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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