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고종 23) 죽산부사로 재직하면서 내무부주사 김가진(金嘉鎭)과 김학우(金鶴羽)·김양묵(金良默), 러시아어 통역 채현식(蔡賢植) 등과 러시아세력을 끌어들여 청나라를 견제하고자 하는 민비와 민영환(閔泳煥)·민응식(閔應植) 등 척신(戚臣)들의 요청으로 러시아공사관을 왕래하면서 러시아공사 베베르(Waeber, K.)와 접촉하였다.
그들은 베베르에게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하는 동시에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도록 협조하여 달라고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베베르가 증거문서를 요구하자, 총리내무부사(總理內務府事) 심순택(沈舜澤)의 명의로 문서를 만들고 국새와 총리내무부사의 인장을 날인하여 베베르에게 보냈다.
그런데 이 교섭을 반대하고 있던 민영익(閔泳翊)의 폭로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 의하여 이 협상은 깨어지고, 조존두는 전라남도 담양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베베르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