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1년(예종 6) 이부시랑 지어사대사(吏部侍郎知御史臺事)가 되었고, 이듬해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거쳐 1113년에는 전중감(殿中監)·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병부상서 추밀원사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114년에도 검교사공 병부상서 참지정사 판형부사(檢校司空兵部尙書參知政事判刑部事)·권추밀원사 판비서성사(權樞密院事判秘書省事)·수사공 판상서형부사(守司空判尙書刑部事)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115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는데, 이때 합격된 사람들의 대책(對策)이 전에 합격한 사람들의 것을 베낀 것이라고 하여 낙제자들이 항소함으로써 시험을 다시 치르게 되었다.
1116년 왕이 서경을 행차할 때 판유수사(判留守事)가 되었고, 같은해 수사도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호부사 상주국이 되었다. 1117년 왕이 남경에 행차할 때 2도에 머물면서 호위한 뒤 1119년 태자태보(太子太保)가 더하여졌으며, 이해에 문하시랑평장사로 죽었다. 시호는 강회(康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