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고종 1)에 영변부사·전라우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866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1871년 우변포도대장을 지냈다. 1876년 1월에는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기 위하여 구로다[黑田淸隆]일행이 6척의 전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상륙하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일본측과 회담에 응하는 한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한강연안을 방비하게 하였다. 어영중군(御營中軍) 양주태(梁柱台)는 행주, 금위중군(禁衛中軍) 신숙(申橚)은 김포군 염창(鹽倉)을 수비하게 하였다.
그해 1월 14일에는 총융사인 조희복이 장관(將官) 10명, 장교(將校) 29명, 표하군(標下軍) 307명, 아병(牙兵) 1초(哨) 125명, 창수(槍手) 50명, 광주별파진(廣州別破陣) 50명, 각도선포수(各道選砲手) 842명 등을 인솔하고 양화진(楊花津)에 도착하여 군사조련과 방수(防守)를 맡았다.
그 뒤 1877년에는 어영대장을 지냈고, 1879년 좌변포도대장을 지내다가 괘서사건으로 인하여 지도(智島)에 유배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