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리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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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개념
조선후기 주로 영남 지방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황의 학설을 따라 이기론에서 이의 우위를 주장한 성리학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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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주로 영남 지방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황의 학설을 따라 이기론에서 이의 우위를 주장한 성리학유파.
내용

영남학파(嶺南學派)라고도 한다. 학자에 따라 약간씩 독자적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었으나, 대체로 이황(李滉)의 학설을 계승, 이기론(理氣論)에 있어 이(理)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이이(李珥)의 학설을 계승, 기(氣)의 우위를 주장한 기호 지방(畿湖地方)의 주기파(主氣派)와 학문적·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주리(主理)라는 용어는 이황이 기대승(奇大升)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인데, 현상윤(玄相允)의 ≪조선유학사≫에서 조선 후기의 성리학을 주리파·주기파·절충파(折衷派)로 분류한 이래 오늘날에는 이 말이 이기론에 있어 이의 우위를 주장하는 학파를 나타내는 말로 일반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영남 출신으로 주기파에 속하거나, 기호 출신으로 주리파에 속하기도 하고, 혹은 분류가 애매해 학자마다 다르게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주리파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이황이 죽은 뒤 약 100년이 경과한 17세기 후반 이현일(李玄逸)에 이르러서이다.

처음 이황이 인성론과 결부시켜 이기의 문제를 해명하면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내지 ‘이자도설(理自到說)’을 주장해 이의 우위성과 능동성을 주창한 이후, 이황 학통의 영남 학자들은 이황의 학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별다른 논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호의 학자들이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에 따라 기의 능동성과 이의 무능동성을 주장하면서 이황의 학설을 비판하게 되자, 영남의 학자들도 이기론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 이황의 학설을 옹호하는 이우위론적 경향으로 학파적 성격을 강화해 나가면서 주리파가 성립하게 되었다.

이 후 주리파의 전통은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근세에까지 계승, 발전하게 되며, 특히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지역이나 사승(師承)과 관계 없이 순수한 학문적 견지에서 주리론을 주장하는 경우도 나타나게 되었다.

주리파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이현일·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류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 등과, 학통은 이들과 다르지만 독자적으로 주리설을 제창한 이로 이항로(李恒老)·기정진(奇正鎭)·류중교(柳重敎) 등이 있다. 또, 실학자 중에서도 이익(李瀷) 계통의 인물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 가운데 이현일은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을 지어 이황의 성리설의 견지에서 이이의 성리설을 19조목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이의 발동을 부인하는 이이의 주장에 대해, 이가 발동할 수 없다면 공허한 것이 되어 모든 변화의 근원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이황의 견해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 비판하고 있다.

이재는 이현일의 아들로 아버지의 견해를 계승해 이황의 학설을 순수하게 옹호하는 데에 힘썼으며, 나아가 이황의 학설과 이이의 학설이 모두 성립한다는 절충적 태도도 비판하였다. 그는 이현일의 ‘호발설’ 옹호의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의 작용을 기다리지 않고 이만으로도 이미 만물의 체용(體用)을 갖추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재의 제자 이상정은 "이는 주재하는 오묘함이요, 기는 재료로 갖추어짐"이라 하여 ‘이주기자설(理主氣資說)’을 전개하였다. 이상정은 또 이와 기의 선후에 대해서 현실에서는 선후가 없으나, 그 근원에까지 미루어나가면 이가 앞서는 것이라 하여 이 우위의 견해를 견지하였고, 나아가 이를 단순한 정지체(靜止體)가 아니라 스스로 운용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존재로 파악하였다.

이상정과 같은 시기의 권상일(權相一)은 ≪관서록 觀書錄≫을 저술,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옹호하였으며, 이가 기를 생성한다는 ‘이생기설(理生氣說)’ 및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주장하였다.

이상정의 제자인 유치명과 그의 제자 김흥락은 이황의 성리설을 계승, 심성설(心性說)에서 기를 억제하고 이를 따르는 수양론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유치명에 이르러 주리론은 한층 강화되어 이가 우주의 주체이자 마음의 본체임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영남학파에 속하면서도 이황의 적통에서 벗어난 인물인 이진상은 ≪이학종요 理學綜要≫를 저술, 주리론의 견지에서 성리학의 전반적인 문제를 분류해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 이가 마음의 본체라고 하는 ‘심즉이설(心卽理說)’을 주장하였다. 이진상의 이러한 견해는 그의 아들 승희(承熙)와 제자 곽종석에게 계승되었다.

이들과는 달리 기호학파의 학맥을 계승하면서도 드물게 주리론을 주장한 인물로 이항로와 기정진이 있다. 이항로는 절충론자로 분류되기도 하나, ‘이주기역설(理主氣役說)’을 주장해 이의 우위를 확인하였으며, 기정진은 이와 기를 대립시키고 이의 우위를 주장하는 일반적인 주리론의 견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가 이에 포함된다고 하는 ‘유리론(唯理論)’을 주장, 주리론을 극(極)에까지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된다.

주리파는 17세기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근 300년을 계승, 발전해 온 학파로서, 한국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인간 심성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인 해명을 추구함으로써 인식론과 존재론, 그리고 수양론에 관심을 집중하는 한국 성리학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작용을 하였으며, 나아가 당쟁과 관련을 맺으면서 조선 후기의 정치사 및 사회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49)
『한국유학사초고』(이병도, 서울대 국사연구실, 1959)
『한국유학사』(배종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4)
집필자
금장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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