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문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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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후기,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에 위치한 책문(柵門)에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행해졌던 사무역.
이칭
이칭
만상후시(灣商後市), 책문 후시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1660년(현종 1)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책문무역은 조선 후기 구련성과 봉황성 사이에 위치한 책문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행해졌던 사무역이다. 1660년(현종 1) 무렵부터 행해진 후시 무역의 일종이다. 무역에 참여한 상인들은 마부·짐꾼으로 가장해 청의 사치품과 비단, 약재류를 수입해 왔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은을 지출한 데다가 청나라 난두배들과 결탁해 여러 농간을 부리는 한편, 사상에게 이익을 빼앗긴 역관들의 반발로 책문 후시는 폐지 위기에 놓였으나, 1755년(영조 31) 정부에서 책문 후시를 공인하고 세를 거둠으로써 무역이 공식화되어 조선 말기까지 유지됐다.

목차
정의
조선 후기,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에 위치한 책문(柵門)에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행해졌던 사무역.
내용

책문은 만주의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 청과 조선의 사신이 왕래하던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1660년(현종 1)부터 청나라와 조선의 사신들이 내왕하는 기회를 이용해 요동의 차호(車戶)와 의주 · 개성의 상인들 사이에 통상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책문무역이 개재됐다.

의주 북단에 위치한 중강에서 개시 · 후시 무역이 열리고 있었지만, 사상인(私商人)이 역관(譯官)의 노자 · 마부로, 또는 지방 관아의 무역별장(貿易別將) 등으로 대청 무역에 참여하는 기회를 포착하기 쉽지 않았고, 그 수도 많지 않았다. 따라서 대다수의 사상인이 참여할 수 있었던 방법은 여마제(餘馬制)나 연복제(延卜制)에 편승하는 것이었다. 이에 서울 · 개성 상인을 비롯,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 사상들이 책문무역에 동참할 수 있었던 기회는 사행이 책문을 출입할 때에 여마(餘馬)나 연복(延卜)에 끼어드는 방법이었다.

여마는 사신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이르는 도중, 세폐 · 방물을 실은 말이 다치거나 병들어 짐부리기 어려울 때를 대비해 의주부에서 보내는 10여 필(匹)의 빈 말[空馬]를 지칭하는 것이다. 여마는 사고가 없는 한 책문에서 회환(回還)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당초 의도와 달리 여마제가 책문무역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면서 여마의 수 또한 늘어났다. 여마제와 더불어 연복제 또한 사상층이 책문무역에 동참하는 매개 수단이 되었다. 연복제는 연경(燕京)에서 귀환길에 오른 사행이 책문에 당도하면 의주부가 빈 말을 보내어 복물(卜物)을 운반하게 한 제도로, 사신의 호송과 지영을 수행하던 단련사(團練使)가 책문에서 귀환할 때에도 연복마를 통한 후시 무역이 행해졌다.

책문무역에 참여한 상인들은 여마 혹은 연복마(延卜馬)를 이끄는 마부 · 짐꾼으로 가장해 청의 사치품과 비단, 약재류를 수입해 왔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은을 지출한 데다가 청의 운송업자인 난두배(欄頭輩)들과 결탁해 여러 농간을 부리면서 책문 후시는 폐지 위기에 놓였으나, 1755년(영조 31) 정부에서 책문 후시를 공인하고 세를 거둠으로써 무역이 공식화됐다.

난두배는 1690년(숙종 16)에 출현한 요봉차호(遼鳳車戶) 12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만상(灣商) · 송상 등 사상인들은 이들과 결탁, 사행의 귀환 중에 복태(卜駄)의 운송을 고의로 지연시키면서까지 사신을 먼저 출책하게 하여 탄압을 없게 한 다음, 마음껏 매매하고 돌아오는 등의 폐단을 자행했다. 책문무역은 이처럼 중국 사행단의 왕래 과정에서, 역관과 무역별장, 사상층이 여마제 · 연복제를 활용해 이익을 추구했던 대표적인 사무역 활동이었다.

책문무역은 연간 4, 5회 개시되었다. 중국의 사치품과 약재류를 수입하면서 상인층이 한 번에 결제하는 은만 10만여 냥에 달했다. 책문 후시가 사상인에게 개방되자 청나라의 상품이 대량으로 국내에 수입되었으며, 국내 상인층과 연결돼 도회지뿐만 아니라 농촌의 향시(鄕市)를 통해 수입품이 유통되었다. 이에 종래 사행 무역을 통해 이익을 보던 역관들은 사상층의 무역로를 봉쇄해 달라는 뜻을 조정에 관철시킴으로써 1725년(영조 1) 무렵 책문무역이 중단되었다. 역관들은 더 나아가 무역별장에 의한 심양 8포 무역과 단련사 제도까지 혁파시키고자 뜻을 모았고 그 결과 1728년(영조 4) 두 제도 역시 폐지되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엽의 국내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과 사상층의 성장은 대청 무역을 쉽게 중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양국 간의 대규모 수출품과 수입품이 유통되던 책문 후시가 막히자, 사상층은 법금(法禁)을 무릅쓰고 국경 지대나 해안선에 접근해 밀무역을 감행했다. 당시 조선의 수출품은 금 · 인삼 · 종이 · 우피(牛皮) · 명주 · 저포(苧布) · 모물(毛物) 등이었고, 수입품은 비단 · 당목(唐木) · 약재 · 보석류 · 문방구 · 신발류 등이었다. 밀무역 장소는 압록강변의 의주 · 강계(江界) · 초산(楚山) · 창성(昌城) · 삭주(朔州) · 위원(渭原) · 벽동(碧潼) 등 강변 7읍(江邊七邑)과 이산진(理山鎭) · 고산진(高山鎭) · 만포진(滿浦鎭)을 비롯한 서해안과 회령 등지였다.

사상인들의 대청 무역이 비합법적인 잠상 행위로 바뀌면서 인삼을 캐기 위해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는 범월(犯越) 사건이 사회 문제화되었으며, 관세가 줄어듦에 따라 재정적인 손실도 커졌다. 이에 1755년(영조 31) 정부에서는 ‘의주부의 빚을 면제해 주고, 변방에 사는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라는 명분 하에 연복에 의한 책문무역을 허용해 주었다.

당시의 책문무역은 만상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만상후시'라 불렸으며, 만상에게 허용된 한정된 사무역 결재 금액을 '만포(灣包)'라 하였다. 사상인에 의한 만상후시가 성행하자 상리(商利)를 잃게 된 역관들이 다시 반발하여 1787년(정조 11) “역관을 없애지 않으려면 후시를 마땅히 없애야 한다.”라고 결의하였고, 그 해에 만상후시가 혁파되었다. 그러나 조정은 후시를 회복하려는 상인들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쳐 다시 1795년(정조 19)에 만상후시를 재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후시를 열어 주는 대신 상인들에게 4만냥의 관세를 적용해 역관과 상인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한편 재정 보충에 활용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동문휘고』
『조선왕조실록』
『증보문헌비고』
『통문관지』
『한국지』
『흠정대청회전(欽定大淸會典)』

단행본

유승주·이철성, 『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경인문화사, 2002)
이철성, 『朝鮮後期 對淸貿易史 硏究』(국학자료원, 1999)
진단학회, 『한국사: 근세후기편』(을유문화사, 1965)

논문

김동석, 「18세기 청나라로 간 조선 상인들의 활동」(『東方漢文學』 73, 동방한문학회, 2017)
김성칠, 「연행소고」(『역사학보』 12, 역사학회, 1960)
유승주, 「조선후기 대청무역의 전개과정」(『백산학보』 8, 백산학회, 1970)
이철성, 「조선후기 압록강과 책문 사이 봉금지대에 대한 역사·지리적 인식」(『동북아역사논총』 23, 동북아역사재단,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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