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에 당시 유명했던 조고약(趙膏藥)을 매약(賣藥)으로 제조하기 위하여 조근창(趙根昶)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그 뒤를 이은 조인섭(趙印燮)대에 와서 사세가 더욱 크게 확장되어 한약제의 무역과 매약의 제조와 건재약방을 겸하여 한때 대표적인 약업체로 손꼽혔다.
조근창은 원래 종의(腫醫)라 하였는데 당시는 종두를 하는 사람을 종두의(種痘醫)라고 하듯이 종의는 지금의 외과의사와 비슷하게 외상환자만을 전문적으로 다루었다.
곪은 상처를 째고 도려낸 자리나 그 상처에 조고약을 붙이면 상처를 아물게 하는 약효가 있었다. 이에 조고약의 약효가 널리 퍼지자 의원은 고약을 만들고 파는 장소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의원과는 별도로 매약제조만을 전업(專業)으로 하는 업체로 천일약방을 설립하고 상품명을 ‘됴고약’이라 하였다. 원래 조고약이 유명했기 때문에 천일약방은 출발부터 순조로웠다. 그러나 이 업체의 규모가 커진 것은 그의 아들 조인섭이 제2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이다.
그는 부업(父業)을 계승하면서 ‘영신환’ 등 품목도 늘리고, 한약건재상을 하면서 한약재의 무역을 하기 위해 예지동의 점포를 확장, 개설하는 한편, 장사동에 공성상회(共成商會)를 설립하였다.
1918년 가을 우리 나라 전역을 휩쓴 ‘스페인감기’라는 유행성 감기가 퍼졌을 때 양약·한약을 가리지 않고 해열제 약제가 모두 품절이 되었는데 오직 천일약방만이 재고가 풍부하여 큰돈을 벌었다. 이 사실만 보아도 그 당시 한약재를 취급하던 실력과 규모를 알 수 있다.
천일약방은 같은 초근목피의 건재를 취급해도 이를 좌절, 분말 등 정제포장을 하여 일반약업계에서 신용을 얻었고, 매약부는 ‘됴고약’과 ‘영신환’에 주력하였다.
‘됴고약’은 조가비방(趙家祕方)이라 하여 유사품 경쟁에서 단연 독주하였다. ‘천일영신환’도 포장의 특색을 살려 백지에 싸 작은 상자에 넣어 종래의 단점인 환(丸)의 원형을 보존하여 소비자로부터 호감을 받았다.
천일약방은 1927년 을지로1가에 지점을 개설하였고, 지방에는 대구·평양·천안·광주 등지에 지점을 두었는데 이때는 주로 한약재를 취급하였고, 일본 대판, 중국의 톈진·상해·홍콩·대만 등지에 지점을 두어 약재무역에 상당한 실적을 올렸다.
천일약방은 유능한 생약학자들을 초빙하여 계농생약연구소(桂農生藥硏究所)를 차렸다. ‘계농’이란 창업자인 조근창의 호이다.
공장 옆을 개조하여 실험연구실을 만들고 전국의 생약산지 분포를 조사하고 성분을 규명하는 등 연구개발에 나섰으나 본격적으로 하지 못했다.
연구투자도 적어 연구의 성과물은 없었으나, 일개의 사기업체에서 이와 같은 일을 하였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그 뒤 계속 발전해 나가던 ‘천일제약’도 집안의 복잡한 사정으로 업체가 기울어 광복 후 재산이 흩어져 문을 닫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