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사람으로 원보(元甫) 김긍률(金兢律)의 딸이며, 혜종의 제3비 청주원부인(淸州院夫人)과 자매간이다.
청주는 신라 5소경 가운데 서원경(西原京)이 있던 곳으로서, 일찍부터 지방관부와 학교를 따로 설치, 운영할 수 있을 만큼 독자적 지방세력이 그 기반을 구축하여 왔던 곳이었다.
그리고 태조가 고려를 건국한 직후 청주인의 반란이 거듭 시도되었을 정도로 반고려적 성향을 나타내고 있었으므로, 태조는 여러 차례 청주에 행차하여 이 지역의 민심수습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청주지방 호족의 딸이 왕실과 혼인을 맺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태조의 노력이 결실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혜종에 이어 정종이 다시 김긍률의 딸과 혼인을 맺게 된 데에는 혜종대의 정국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945년(혜종 2)에 왕규(王規)가 왕의 아우인 왕요(王堯: 정종)와 왕소(王昭: 광종)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참소하자, 혜종은 아우에 대한 신뢰의 표시로 자신의 딸인 공주를 둘째아우인 왕소에게 출가시켰다고 하였다.
그 경우 큰 동생인 왕요에게도 상당한 배려가 필요할 것이며, 따라서 혜종은 자신의 처제를 왕요의 배필로 삼게 하였던 것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