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견(汝堅). 호는 소계(蘇溪). 아버지는 최운철(崔云哲)이다.
1585년(선조 18) 무과에 급제한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최균(崔均)과 함께 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시민(金時敏)과 합세하여 진주성싸움에서 공을 세웠고, 1593년 김해로부터 웅천에 침입하려는 적을 격퇴하였으며, 1594년 김덕령(金德齡)의 별장으로 고성에서 왜군과 싸우는 등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1605년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로 승진하였고, 1606년 경상좌수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 김제남(金悌男)의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문초를 받은 뒤 방송되었으나, 사직하고 은퇴하였다.
후일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퇴하고, 56세로 죽었다. 1816년(순조 16) 형 최균과 함께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고성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숙(義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