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지

  • 역사
  • 인물
  • 고려 후기
  • 조선 전기
조선 전기에, 김제군수, 남원부사, 예문관직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가구(可久)
  • 연촌(烟村), 존양(存養)
인물/전통 인물
  • 본관전주(全州)
  • 사망 연도1455년(세조 1)
  • 성별남성
  • 주요 관직예문관직제학
  • 출생 연도1384년(우왕 10)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김용만 (영남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최덕지 초상 및 유지 초본 미디어 정보

최덕지 초상 및 유지 초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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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김제군수, 남원부사, 예문관직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최용봉(崔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을인(崔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최담(崔霮)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 되었는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참고문헌

  • - 『태종실록(太宗實錄)』

  • - 『문종실록(文宗實錄)』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산당집(山堂集)』

  • -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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