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성품이 너그럽고 글을 잘 지었다. 광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공문박사(攻文博士)가 되었다. 성종이 즉위하기 전에 사우(師友)관계가 있었으므로 즉위하자 특별히 등용되었고, 또한 인망이 있어 여러 벼슬을 거쳐 좌산기상시 참지정사 겸 사위경(左散騎常侍參知政事兼司衛卿)이 되었다.
병으로 해임되었다가 왕의 특별배려로 복직되어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임명되었고, 이어 내사시랑 겸 민관어사 동내사문하평장사 감수국사(內史侍郎兼民官御事同內史門下平章事監修國史)에 이르렀다. 또한, 993년(성종 12) 10월 거란의 1차 침입 때 하군사(下軍使)가 되어 상군사 박양유(朴良柔), 중군사 서희(徐熙)와 더불어 북계(北界)에서 진출하는 거란을 막았다.
995년 4월에 죽으니 왕이 애도하여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추증하고, 쌀 300석, 보리 200석, 뇌원다(腦原茶) 1,000각(角)을 부의(賻儀)하였다. 998년(목종 1) 4월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여러 번 추증되어 태위 태보 태사 내사령(太尉太保太師內史令)이 되었으며, 1033년 10월에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광빈(匡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