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박천 출신. 1903년 평안북도 운산(雲山)의 미국인 경영 광산회사에 근무하다가 미국인의 추천으로 인천개발회사에 전직하고, 이듬해 이 회사의 알선으로 호놀룰루에 이주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자강회(自强會)를 조직, 선전기관지로 『신조신문(新潮新聞)』을 발간하였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임치정(林蚩正)·이교담(李敎潭) 등과 함께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간하여 동포들의 배일사상을 고취하다가 1911년 귀국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입국하여 명제세(明濟世)·조만식(曺晩植)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의 특명으로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1920년 미국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서울역에서 총독 등 일본고관을 암살하려다 사전에 발각, 붙잡혀 1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오산학교(五山學校) 영어교사로 있다가 사상불온자라는 총독부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재차 만주로 망명하였다. 1938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동변도(東邊道) 총사령관 문빈(文彬)과 연락을 취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