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정계비도(白頭山定界碑圖)」는 개항기 감계사 이중하(李重夏)가 기록하였다.
1매의 필사본이다. 크기는 세로 97.6㎝, 가로 56.9㎝이다. 표제는 ‘백두산정계비지도(白頭山定界碑地圖)’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1712년(숙종 38)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가 세워진 이후, 청의 봉금 주1이었던 만주에 조선인이 들어가 개간하며 터전을 마련하자, 조선과 청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하였다. 조선과 청 사이의 국경을 확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1712년에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하여 국경 교섭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국은 1885년(고종 22)과 1887년(고종 24) 두 차례, 공동으로 백두산 일대에 대한 국경 조사를 실시하였다. 「백두산정계비도」는 1887년 조선의 감계사 이중하가 청과의 회담 이후 그린 것이다.
지도 상단의 주기에 1887년 5월 26일, 중국 감계관 방랑(方朗)과 덕옥(德玉), 진영(秦煐), 조선 감계사 이중하, 그리고 위원 팽한주(彭翰周)가 이 회담에 참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지도는 방위 표시가 없어 방향을 혼동하기 쉽다. 지도에서 동쪽은 북쪽, 서쪽은 남쪽, 남쪽은 동쪽, 북쪽은 서쪽을 가리킨다. 백두산은 북쪽에 그렸으며, 그 남쪽으로 천지인 대택(大澤)이 있고, 그 아래에 정계비를 뚜렷하게 표시하였다.
청과 1차, 2차 감계 회담을 진행하였으나 경계 획정에 이르지 못해 회담은 결국 결렬되었고, 회담 과정과 결과를 담은 이 지도만 남게 되었다. 이중하는 토문강이 두만강과는 별개의 강인 오도백하로서 송화강과 합류한다는 사실을 이 지도에 명확하게 그려 넣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이 지도 외에 「백두산정계비지도」가 소장되어 있다. 이는 정계비 설치 이후 경계가 불분명한 지역에 돌이나 나무 등으로 경계를 명확히 표시한 상황을 기록한 지도이다.
19세기 말 조선과 청 사이의 국경분쟁과 경계 협정의 과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당시 감계사의 외교적 노력과 지리적 인식을 시각적으로 잘 담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