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겸(士謙). 최상(崔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북평사 최태형(崔泰亨)이고, 아버지는 참봉 최염(崔濂)이며, 어머니는 김창연(金昌衍)의 딸이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1761년(영조 37) 음보(蔭補)로 숭릉참봉(崇陵參奉)이 되었으며, 전생서봉사(典牲署奉事)로 재임 중이던 1763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사간원정언이 되었고, 사헌부지평·홍문관수찬을 거쳐 이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770년 이조낭관으로서 당시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에 죄가 큼을 논하고, 세손으로 하여금 사도세자의 묘사(墓祠)에 참배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가 대신들의 맹렬한 탄핵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영조의 노여움까지 사서 영구히 서인(庶人)으로 대정현에 유배되었고, 계속되는 고문으로 장하(杖下)에 죽었다.
1790년(정조 14) 양주에 살던 그의 딸이 한 번의 상소로 죽음에 이른 것은 너무 과중한 처벌이므로 신원(伸寃)하여 줄 것을 호소하여 오자 정조의 특명으로 복관되었고, 이어 규장각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