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원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첨지중추부사, 병조참지, 오위행사직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혼연(渾然)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31년(세종 13)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초계(草溪)
주요 관직
오위행사직
정의
조선 전기에, 첨지중추부사, 병조참지, 오위행사직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혼연(渾然). 아버지는 최안지(崔安止)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53년(단종 1) 증광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출사하였다.

1459년(세조 5)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이순지(李純之)와 함께 『기정도보(奇正圖譜)』속편을 편찬해 올리고, 다시 1463년(세조 9) 영순군(永順君) 이부와 함께 『팔괘도법(八卦圖法)』 을 편찬해 올렸다.

1468년 판관(判官)으로서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1479년(성종 10)경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제수되고, 이어 봉상시정(奉常寺正)을 지냈다.

1484년 무반 당상계인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르면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고, 오위행호군(五衛行護軍)을 거쳐 문반계인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전환되면서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문과 출신이면서 학술이 부정하고, 음양지리 등을 신봉해 정무직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탄핵되면서 파직되었다. 그리고 다시 천문지리 등을 폐지함은 불가하다는 상서로 인해 논죄되면서 고신(告身: 관직 임명사령장)을 모두 몰수당하고 외방에 부처(付處)되었으나 곧 고신을 돌려받고 복직되었다.

1488년 왕명을 받고 세종대에 편찬을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한 『태일력(太一曆)』을 편찬해 올렸다. 이후 위장(衛將)에 재직하면서 왕실의 각종 풍수사 등을 관장하였다.

이듬해 위장으로서 휘하인 낭장(郎將) 이계희(李季禧)의 불법을 엄폐한 일로 파직되고 직첩(職牒: 관직 임명사령장)을 몰수당하였다. 1490년 직첩을 돌려받고 곧 복직되며, 1500년(연산군 6) 오위행사직(五衛行司直)으로 치사(致仕: 정년퇴직)했다가 졸하였다.

정심(精深)한 풍수지리 지식으로 세조와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풍수지리학의 육성과 국가 및 왕실의 각종 풍수지리사에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室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초계최씨세보(草溪崔氏世譜)』
집필자
한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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