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중도적석총은 1981년 의암호의 수위 변동으로 발생하는 호수변의 무너짐 현상으로 파괴되는 문화유산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여 그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유리건판을 보면 이 유적은 일제강점기 고적 조사 일환으로 조사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지만, 자세한 시기와 내용은 알 수 없다.
중도 남동쪽 부분에 쌍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 어느 장군의 말을 묻었다고 하여 ‘말무덤’이라고도 불렸다. 1981년 중도선사유적 발굴조사단에서 조사하여 무덤의 내부 구조와 축조 방법이 일부 밝혀졌다.
무덤은 강돌로 무덤 칸을 여러 개 만들어 시신을 안치한 것으로 추정되며, 널과 덧널은 확인되지 않았다. 모래언덕에 강돌을 쌓아 봉분을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
무덤 크기는 지름 14m, 둘레 44m, 높이 5m이다. 무덤 칸이 여러 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나, 보고 내용은 자세하지 않다. 최근 정선아우라지유적, 광주곤지암리유적에서 이와 유사한 모습의 돌무지무덤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과거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조사된 돌무지무덤의 매장 방식도 재검토가 필요하다.
출토 유물은 무덤의 주변에서 토기 조각이 다량 수습되었고, 무덤 내부에서는 청동귀걸이, 작은 쇠손칼, 쇠화살촉, 쇠못, 용도 미상 철기와 함께 수백여 점의 토기 조각 등이 동반되었다. 토기는 두드림무늬를 시문한 적갈색과 회청색 토기, 깊은 바리토기, 한성기 백제의 곧은입항아리류가 동반되었다.
춘천중도적석총은 지금의 중국 동북 삼성 일부와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돌무지무덤과 비슷한 겉모습을 보여 주지만, 무덤 칸의 축조 방식은 고구려와 차이가 있고 동반 유물도 고구려계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 특징을 보여 준다.
한성기 백제의 곧은입항아리는 중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과 한성기 백제와의 연결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성 시기는 삼국시대인 3세기 말~4세기 전반경으로 이 시기 마을의 유력자 무덤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