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정치권력은 백성들의 합의와 추대에서 비롯된다는 상고에서 논의를 출발한다. 즉, 옛적에는 5가(家)가 1린(隣), 5린(隣)이 1리(里), 5리가 1비(鄙), 5비가 1현(縣)이 되는데, 각 단위의 장은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서 책임자로 추대된다. 제후와 천자 또한 그 같은 과정에서 선출된 장(長)이다. 이처럼 권력의 기원이 아래로부터의 합의에 있기 때문에 합의가 결렬되거나 추대 이유가 사라지면 책임자는 물러나거나 끌어내려져야 한다. 이 원리는 작은 마을 단위에서나 큰 정치 단위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즉, 천자라 할지라도 백성들의 합의와 전체의사로 권좌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다. 다만 천자를 권력에서 끌어내릴 때는 강등해 제후나 그에 준하는 예우를 했다.
그런데 진(秦)이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면서부터 그 전통이 무너졌다. 이것이 통치자의 자유로운 교체를 막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진한(秦漢) 이후 천자는 신성불가침의 권력으로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을 임면(任免)했는데, 이런 제도 하에서 아래로부터의 회의와 도전은 용납될 수 없는 ‘반역(返逆)’으로 여기게 되었다. 사람들은 시대의 관행과 이념에 따라 순(順)과 역(逆)을 규정하지만, 정약용은 옛 상고시대의 예와 정의의 원칙에 따라 오히려 순과 역이 도치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통치자는 악단의 지휘자 같은 것인 바, 모두의 조화와 협력, 그리고 일의 능률을 위해 선택된 사람이다. 적임이 아니라면 당연히 다른 사람을 뽑아 맡겨야 하고, 이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라고 역설한다.
그런 점에서 무력으로 역성혁명을 일으킨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을 보는 은근한 부정적 시각은 불식되어야 한다. 그들은 선양으로 왕위에 오른 성군인 요순(堯舜)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사람들이다. 상고 때에 무도하고 쇠약한 신농씨(神農氏)의 후손들을 정벌하고 새로운 왕조를 연 헌원씨(軒轅氏) 이래, 백성과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무능하고 불의한 통치자를 전복시키는 것은 반역이 아니라, 오히려 정당한 쾌거이다.
이 같은 정약용의 주장은 그의 실학적 태도가 정치학적 인식에 반영된 주장이지만, 세습 권력의 기반이 공고한 당시로서는 가위 혁명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