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적은 대동강 중류의 한 지류인 남강이 대동강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남강 좌안을 따라 약 1.6㎞ 올라간 곳에 있다. 1955년 4월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에 의해 동서 250m, 남북 100m 범위가 발굴되어 10기의 주거지와 1개의 저장구덩이가 조사되었다.
이 유적들은 크게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로 구분된다. 신석기시대는 제1문화층과 제2문화층으로 나뉜다.
제1문화층은 가장 이른 시기로서 7호 주거지가 이에 해당된다. 전형적인 뾰족밑그릇 전면에 줄무늬·톱니무늬·생선뼈무늬를 배합 시문한 빗살무늬토기와 돌보습·타제돌도끼·화살촉 등이 출토되어 궁산문화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다.
제2문화층은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해당되며 5·9·10·11호 주거지가 이에 속한다. 토기에는 마연수법이 보이고 덧띠무늬토기, 빗살무늬계 민무늬토기, 전면에 생선뼈무늬를 시문한 토기, 돌로 만든 팔찌 등이 출토되어 다양한 문화요소가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층에서는 1·2·3·5호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여기서는 팽이토기·돌돈〔石貨〕·청동끌이 출토되었다. 토기로는 전형적인 팽이토기와 변형 팽이토기가 공반되고 있다.
금탄리 주거지는 모두 땅을 0.3∼1.0m 가량 파 들어간 수혈주거지로서 20∼30㎡ 크기에 달한다. 신석기시대에는 방형이나 장방형이 모두 보이지만 청동기시대에는 장방형 주거지만 보이며, 그 중에는 60㎡가 넘는 대형 주거지도 섞여 있다. 주거지 안에는 모두 1개씩의 화덕이 중앙 혹은 한 쪽으로 치우쳐 만들어져 있고, 바닥에는 진흙을 깔아 견고하게 다지거나 맨땅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이 곳 주민들은 보습·삽·낫 등을 사용해 원시적인 농경을 실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9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600개가 넘는 그물추 일괄은 이들이 강가에서 상당한 규모의 고기잡이에 종사했음을 말해준다.
금탄리 유적은 신석기시대 중 비교적 늦은 시기로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중요한 시기의 유적으로서 시대가 변하는 과도기에 마연수법, 덧띠무늬토기, 민무늬계 토기 등의 새로운 요소가 채택되면서 다음 단계인 청동기시대로 이어진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