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생활관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기와와 토기편들이 발견됨에 따라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긴급수습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된 유구는 두 건물이 중첩되어 있으며, 앞 시기의 유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뒷 시기의 유구는 서북∼동남을 장축으로 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소형 건물지로서 일부 적심을 남기고 있으며 그 간격은 3.6m이다. 두 건물지의 연대는 모두 8∼9세기에 걸치는 통일신라 초기에 해당하며, 두 건물지간의 시기차는 그다지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출토유물은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와 기와가 주류를 이룬다. 건물지 주변에서는 백제시대의 삼족토기편을 비롯해 고려시대의 토기 · 기와 · 청자, 조선시대 분청사기 · 백자 등이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기와는 당초문 암막새를 비롯한 선조문 방격문 평기와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는 ‘國城(국성)’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토기는 인화문이 시문된 것으로서 안압지나 경주 충효동 고분군 출토품과 유사하다. 그 외에도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원형의 토제 벼루 2점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광주 시내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지이다. 이것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통일신라시대의 ‘무진도독고성(武珍都督古城)’과 관련된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광주는 백제 이래 무주(武州) 또는 무진주(武珍州)로 불렸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9주 5소경의 지방제도가 갖춰지면서 문무왕 18년(678년)에 아찬(阿飡) 천훈(天訓)이 무진주 도독으로 파견되었고, 경덕왕 16년(757년)에는 무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그 치소에 해당하는 ‘무진도독성’에 대한 단서를 전혀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 누문동 유적은 통일신라 초기의 건물지이고, 이 유적이 있는 누문동과 북동 일대는 고대도시에 보이는 입지조건과 도로망을 갖추고 있다. 그 외곽에는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걸치는 여러 사찰터에 석탑이나 석불, 석등이 남아 있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건물지가 집중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누문동과 북동 일대는 무진도독성이 자리잡고 있었던 지역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