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서편의 서천(西川) 건너 쪽 구릉 위에 있다. 구릉의 북쪽과 동쪽은 급하게, 남쪽은 길고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며 뻗어 있는데, 이 사면에 십수 기의 고분이 몰려 있다.
1933년 일본인 아리미쓰(有光敎一) 등이 고분들 중 10기를 조사했는데, 도굴을 당해 천장이 남아 있는 것은 3기뿐이었다. 10기 중 6기는 구릉의 정상 가까운 곳에 모여 있었고, 4기는 아래쪽에 산재해 있었다.
고분은 전부 굴식 돌방〔橫穴式石室〕을 주체로 하는 원형분(圓形墳)으로 돌방의 평면은 대략 분구(墳丘)의 중심에 있다. 돌방은 방형의 널방〔玄室〕과 좁고 긴 널길〔羨道〕로 되어 있는데, 천장부는 한 장 내지 두 장의 판석으로 덮는 식이다.
3기 외에는 널방과 널길의 벽과 바닥에 모두 회칠이 되어 있다. 제1·3호분을 제외하고는 널받침〔棺臺〕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 널받침들도 대부분 회칠이 되어 있었다. 널길은 제10호분 이외에는 모두 남쪽으로 나있었는데 경사면이 남쪽이기 때문인 듯하다.
널길의 위치는 제5·7·10호가 경사면쪽 벽의 중앙에, 그 밖의 고분은 모두 서벽쪽에 붙어 있었다. 입구는 단순한 판석 또는 문으로 폐쇄하고, 그 바깥쪽을 점토와 돌로 쌓아 견고히 막았다. 문은 형식화된 것으로 개폐가 되지 않고 점토와 회를 칠하여 영구적인 폐쇄를 목적으로 하였다.
이러한 구조의 굴식 돌방무덤은 기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나 구덩식 나무덧널무덤〔竪穴式木槨墳〕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어 고구려·백제의 고분 등에서 볼 수 있는 외래적 형식임이 확실하다.
제7호분 시신의 처리에서 특이한 점으로 양다리에 수키와를, 그리고 가슴에 암키와를 덮은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예는 이 지역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것이다.
출토유물은 굽다리접시〔高杯〕·단지〔壺〕·합(盒) 등의 용기류와 큰칼〔大刀〕·손칼〔刀子〕·화살촉 등의 철제 무기, 곱은옥〔曲玉〕·절자옥(切子玉)·띠고리〔鉸具〕 등의 장신구, 그리고 매장용의 돌베개〔石製頭枕〕·발받침〔足座〕·와전(瓦塼) 및 문고리장식 등이 있다.
이 중 토기는 도장무늬〔印花文〕가 새겨진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토기로, 안압지(雁鴨池)와 같은 생활유적에서 출토된 것들과 똑같다. 또한, 돌베개는 경주시내의 쌍상총(雙床塚) 및 고구려·백제의 돌방무덤 등에서도 발견되었으며, 충효동 고분군 부근의 서악동(西岳洞) 돌방무덤에서도 보이고 있다.
이 굴식 돌방무덤들은 통일신라시대 초기를 전후한 시기의 것으로 믿어지는데, 백제·고구려 돌방무덤에서 영향을 받아 묘제의 전환이 전반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