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또는 관구(棺柩)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관과 곽(槨), 그리고 광(壙)의 구별은 쉽지 않아서 용어사용에 혼란이 오는 경우가 있다.
유해를 담은 관은 곽 속에 두고, 곽은 광 속에 두는 것이 보통이나, 광 속에 직접 관을 두거나 곽 속에 관을 두지 않고 직접 유해를 안치하거나, 곽 외에 광을 설치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관은 그것을 만든 재료에 따라 목관(木棺)·석관(石棺)·옹관(甕棺)·도관(陶棺)·와관(瓦棺) 등의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목관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의 목관은 대체로 썩어서 남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발견된 예가 없어서 그 형태는 확실하지 않으나, 묘광의 형태나 출토된 예로 보아서 장방형이 대부분 인 듯하다.
목관은 신석기시대에도 일부 사용되었다고 생각되지만, 유행하게 된 것은 토광묘(土壙墓)가 일반적인 묘제로 채택되었던 초기 철기시대 이후부터이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평양 정오동·정백동(貞柏洞) 유적을 들 수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많은 목관이 발견되어 목관의 구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정오동1호 묘의 목관은 길이 약 2m 정도의 것인데 밑판의 양쪽가에 홈을 파고 옆판의 아래쪽은 가운데 부분이 도드라져 나오게 하여 밑판의 홈에 맞추었다.
밑판과 옆판 네 곳에는 각각 {{#024}}형으로 나비장홈을 파내어 나비장으로 쐐기를 끼워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였고, 머리 쪽 옆판과 발 쪽 옆판에는 각각 두 곳에 똑같은 장치를 하였다. 뚜껑에는 붉은 옻칠을 하였다.
정오동12호 무덤의 서쪽 목관의 경우에는 통나무를 네모지게 다듬어서 U자형으로 안을 파내고 옆판 양쪽에 ㄷ자형의 홈을 수직으로 파서 마구리를 위에서 내려끼운 특수한 것이다. 목관은 고분시대 이후 신분·계급에 관계없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믿어진다.
백제 무녕왕릉 출토 왕의 목관은 장방형으로 뚜껑은 세 개의 장대한 밤나무를 아래위로 이어 집의 지붕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그 잇는 방법은 아래위 재목을 서로 어긋나게 겹치고 큰 못을 박아서 고정한 것이다. 왕비의 관신(棺身)을 보면 좌우에 긴 측판 3매와 양마구리에 댄 판자 1매를 서로 맞추어짜고 못을 박았는데, 네 귀는 서로 어긋나게 촉을 만들어 연결한 것이다.
신라의 천마총목관은 아래쪽 판재와 측판과의 연결은 촉을 달아서 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조선시대의 목관도 이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 하다.
석관(石棺)은 주로 지석묘나 돌널무덤의 내부시설로서 나타나게 되는데 외국과는 달리 땅속에 묻힌 채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석재를 가지고 구축하는데 구축하는 방법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한 개의 돌을 깎아 관신을 만드는 고발식(刳拔式) 석관이며, 다른 하나는 여러 석재를 조합해서 만드는 조합식 석관이다. 선사시대의 석관은 거의 모두가 조합식 석관이며 역사시대에도 조합식 석관이 많이 사용되었다.
고발식 석관은 통일신라시대에 일부 사용되었다. 조합식 석관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그 하나는 평평한 판석을 이용하여 만든 상식(箱式) 석관이고, 다른 하나는 할석(割石)을 쌓아서 만든 적석식(積石式) 석관이다. 이러한 조합식 석관은 청동기시대에 가장 유행한 형식의 하나이다.
고려시대에도 조합식 석관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석재는 판상으로 가공하여 표면에 사신(四神) 또는 12지상을 선각(線刻)하였고, 내면에 묘지(墓誌)를 선각한 것도 있다. 고려시대 상식 석관은 대체로 길이가 1m 이내이므로 화장용(火葬用) 또는 개장용(改葬用)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옹관(甕棺)은 토기그릇을 관으로 대신 사용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 이래 사용되어왔다. 크게 단옹식(單甕式) 옹관과 조합식 옹관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단옹식 옹관은 시체를 담는 항아리가 하나이고, 조합식 옹관은 둘 이상의 항아리로 연결된 형식이다. 단옹식은 지하의 토광에 수직 또는 비스듬히 묻힌 채 발견되었는데, 뚜껑은 돌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는 부여 송국리의 독무덤으로 이는 유아용으로 사용되었다. 조합식 옹관은 항아리 두세 개를 맞붙이거나 연결해서 이용한 것인데 대체로 초기 철기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유아용과 성인용의 것이 모두 있다. 특히, 전라남도 나주와 영암 등지에서 발견되는 백제시대의 대형 독무덤이 유명한데, 지역적인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옹관은 계속 제작, 사용되어서 최근까지도 어린이가 죽으면 독에 넣어서 묻는 풍습이 있다. 이 밖에 백제시대에는 호관(壺棺)도 사용되었으나 옹관과 비슷하다.
도관은 관을 흙으로 빚어 구운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예는 그다지 많지 않아, 백제시대와 고려시대 도관만이 알려져 있다. 공주군 마암리 출토의 백제시대 도관은 평면이 장방형이며, 뚜껑이 있는데 소형이기 때문에 유아용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널리 퍼짐에 따라 화장이 성행하면서 도관이 많이 제작되었다.
와관은 기와를 이용해서 관을 대신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황해도 은율군 운성리 초기 철기시대 유적의 와관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벽과 바닥이 반타원형을 이루도록 긴 토광을 파고 거기에 암키와를 한 벌 깐 다음에 시체를 넣고 그 위에 같은 암키와를 덮고 양쪽으로 열린 구멍은 벽돌로 막은 것이다. 이러한 와관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모양으로 후대의 와관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묘제는 밝혀진 것이 없어 어떤 관이 사용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청동기시대에는 지석묘의 하부구조로서의 석관과 돌널무덤의 석관 및 목관, 단옹식의 옹관 등이 사용되었으며 초기 철기시대에는 널무덤의 목관과 옹관·와관 등이 사용되었고, 원삼국시대에도 목관과 석관 그리고 옹관·호관·도관 등이 사용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목관과 함께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골호(火葬骨壺)가 많이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소형상식석관·도관·목관이, 조선시대에는 목관이 주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