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시 동북쪽의 대동강 지류인 남강 하류의 하안단구에 위치해 있다. 1961년 10월 몇 점의 유물이 발견된 뒤, 1962년 3월 이원근·백용규에 의해 정식 발굴이 실시되어 2기의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제1호 주거지는 길이 5.5m, 너비 4m, 깊이 0.4m 크기의 장방형 수혈주거지이다. 바닥은 3㎝ 두께로 점토를 깔아 단단하게 하였다. 내부에는 중앙에서 약간 남쪽에 치우쳐 화덕자리로 추정되는 불에 탄 부분이 있다. 바닥 위에는 지붕이 내려앉은 흔적이 남아 있다.
바닥 가장자리를 따라서는 지름 10∼12㎝ 크기의 숯이 10∼30㎝의 높이로 벽에 잇닿아 있어 벽을 이룬 기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둥 사이의 간격은 대략 10∼30㎝ 정도이다. 바닥 가운데부분에는 기둥구멍은 없지만 지름 20∼25㎝, 길이 1m 크기의 숯기둥이 길게 넘어져 있어 용마루가 타다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거의 없다.
제2호 주거지는 길이 10.5m, 너비 5.2m, 깊이 0.45m 크기의 장방형의 수혈주거지이다. 1호 주거지와 마찬가지로 바닥은 점토를 깔아 다졌다. 화덕자리로 추정되는 불에 탄 부분이 3군데에서 발견되었다. 바닥에서는 기둥구멍이나 기둥을 세우기 위한 주춧돌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벽과 북벽에서는 숯자국이 일정한 간격으로 드러나 있어 벽을 세운 흔적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토기와 석기가 많이 있었다. 토기는 비교적 긴 목이 달린 항아리가 특징적이다. 소성도가 높고 두께가 얇으며 표면은 마연되어 있는 등 팽이모양토기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팽이모양토기의 전통은 유지하고 있다.
석기는 화살촉이 많고 기타 도끼·끌·대팻날·창·반달칼·달도끼·그물추·가락바퀴·숫돌·돌돈〔石貨〕 등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이 외에 불에 탄 삼끈 3㎝ 정도, 뼈송곳, 사슴·돼지 등의 동물뼈, 대합과 같은 조개껍질 등이 출토되었다.
입석리 유적의 연대는 토기가 팽이모양토기의 전통을 가진 늦은 시기라는 점과 석기가 날만 잘 마연되어 있고 몸체는 비교적 거친 편으로 퇴화현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비교적 늦은 청동기시대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