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산신을 모시는 일종의 산신당이다. 원래 근처에 여산신각과 부군당 신목(神木)이 있어서 이 남산신각과 함께 평창동 동민들의 동제의 대상이었으나, 여산신각은 소실되었다. 부군당 건물도 없고 부군당 신목이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제65호로 되어 있다.
이 산신각 위에는 조선시대 천제단(天祭壇) 터가 있고, 밑에는 조선시대 양곡보관소였던 평창 터가 있다. 당의 역사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산신각 제단 위에 있는 종에 정유년(丁酉年)이라 새겨져 있고, 여산신각의 여산신도에 1923년에 그렸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정유년이 1957년인지 아니면 1897년이나 또는 더 그 이전인지는 알 수 없다.
현재 남아 있는 산신각은 목조 맞배지붕(기호노인상) 형태의 한옥으로, 정면과 측면이 모두 1칸인 조그마한 규모이다. 내부 정면에 기호노인상(騎虎老人像 : 지붕의 양 옆면이 막 잘려진 지붕)의 산신도(가로 97㎝, 세로 108㎝)가 걸려 있다. 여산신각도 1평 정도 넓이의 한와(韓瓦) 목조건물이었고, 안에는 여산신도가 걸려 있었으나 1974년경에 모두 소실되었다.
이 여산신도에는 1923년의 작품임과 아울러 화가의 이름까지 밝힌 기록(大正十二年癸亥 八月二十四日 山神奉安于大同出草 畫師 金禮安堂 堂奎)이 있었다. 이들 남산신각과 여산신각, 부군당 신목에는 매년 음력 3월 1일에 마을의 노인들이 추렴을 하여 마을의 안녕을 비는 유교식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집집마다 분배하여왔다.
이것은 지연적 단합을 다짐하는 동제의 한 형태이며, 특히 산세가 험한 지리성을 그대로 잘 반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산신개념으로 표상된 산악숭배의 전통과 동제의 전통이 결합된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여산신각과 여산신도는 산신을 여신으로 여긴 매우 오래된 고형관념(古型觀念)을 구상화하여 보여주는 귀중한 민속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