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신창(新昌). 한미한 가계(家系)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무예를 배우고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萬戶)·첨사(僉使)를 역임하고, 뒤에 현감에 이르렀다.
성품이 굳세고 사리에 정통하고 재지(才智)가 예민하였다. 소년시절에 김상헌(金尙憲)을 따라 바다를 건너 명나라 서울에 갔는데 그때 김상헌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또, 일찍이 박승종(朴承宗)을 추종하였는데 박승종이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자살하니 친척은 도망가거나 숨어서 그 시체를 거둘 자가 없었다. 그가 혼자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자 사람들이 그의 의기(義氣)를 칭송하였다.
1640년(인조 18) 김상헌이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의주에 돌아왔으나 적신 이규(李煃)의 간언으로 또다시 심양에 잡혀가게 되었다.
이 때 그는 경사(京師)에서 그 말을 듣고 3일 만에 의주로 달려가 김상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심양으로 따라가서 고생을 같이하였다. 이 일로 그의 의(義)가 높이 추앙되었으며, 김상헌의 증손 김창협(金昌協)은 그의 사적(事蹟)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