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 중량기인 저울은 온전한 것이 발견된 사례가 없지만, 『삼국사기』를 비롯한 문헌 자료에 ‘斤 · 兩’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고 돌로 만든 추 · 청동으로 만든 추 ·1근이 기록된 거푸집 등이 출토된 사례를 고려할 때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부터 표준 중량기가 사용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표준 중량기의 단위는 ‘斤 · 兩’이었고, 1근은 중국 漢代의 무게와 비슷한 약 250g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는 정종 6년(1040)에 저울을 새롭게 정하였다는 기록을 고려할 때 표준 중량을 새롭게 제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정종 12년에는 매년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중앙과 지방에서 검사하여 저울의 부정사용을 막고자 하였다. 이시기의 1근은 이전처럼 16兩의 체계였고, 단위 무게는 당 · 송대와 비슷한 약 630g 정도였을 것으로 유추된다.
조선시대의 표준 중량기인 저울은 세종 3년 공조에서 중앙과 지방의 저울이 부정하므로 바로 잡을 것을 건의하자 세종이 이를 허락하였고, 이듬해인 세종 4년에는 새 저울 1,500개를 만들어 보급하여 옛 저울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지만 저울은 완전히 통일되지 못하였음을 세종 9년에 다시 저울을 모두 교정하여 만들도록 한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세종 9년에 교정된 표준 중량기의 종류와 단위는 『경국대전』에 의하면 ‘황종관에 기준하여 물의 중량 88분에 기준하였는데, 10리(釐)가 1분이고, 10분이 1전이고, 10전이 1량이고, 16량이 1근이고, 큰 저울(大稱)은 100근, 중간 저울(中稱)은 30근, 작은 저울(小稱)은 3근 혹은 1근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표준 중량기의 단위는 ‘리 · 분 · 전’이 새롭게 추가되었고, 종류는 대칭, 중칭, 소칭 등이 존재하였다. 단위의 무게는 박흥수가 황종율관용수 88분을 35.307g으로 측정하였는데, 이를 기준으로 1분은 0.04012g, 1전은 4.0122g, 1량은 40.1218g, 1근은 641.946g이었음을 유추하고 있다.
근현대시기의 표준 중량기인 저울은 광무 7년(1903년) 7월 1일부터 36조의 ‘도량형규칙’을 통해 단위와 무게가 새롭게 제정되었다. 조선시대 저울의 단위인 대칭, 중칭, 소칭을 없애는 것만 아니고, ‘근 · 량’을 기본으로 ‘전 · 분 · 리’와 함게 ‘리’ 아래 ‘毫’를 추가하였다. 미터법에 따라 무게의 단위도 그램(g)을 ‘久覽’으로 하였고, 량을 기준으로 량은 37.5g으로 정하였다. 한편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이후인 1909년에 우리의 도량형의 단위를 일본 도량형의 명칭과 제도로 바꾸었다. 표준 중량의 단위인 량과 전을 삭제하고, 관(貫)을 기준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돈(匁)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즉 표준 중량의 단위는 관, 근(160/1,000관), 돈(1/1,000관), 분(1/10,000), 리(1/100,000), 호(1/1,000,000)이었고, 관과 돈은 우리의 전통적인 무게의 단위로 사용되지 않았던 단위들이 1909년부터 사용된 것이었다.
해방이후 저울은 척관법폐지를 위한 계량법안이 국회 상공위에서 통과되었고, 1964년부터 무게의 표준은 1근(16량)을 기준으로 600g으로 확정하였다. 이 때 돈도 3.75g으로 정하여 사용하였다. 따라서 관과 돈 등의 표준 중량의 단위는 빨리 청산하여야 할 것이다.
저울은 고려 정종 6년 權衡을 정했다는 기록을 고려할 때 이때 새롭게 통일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전부터 이미 표준 중량기인 저울이 존재하였음을 반증한다. 따라서 표준 중량기인 저울은 처음 체계적으로 사용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부터 널리 되었다.
표준 중량기는 조선시대에 더욱 제도적으로 완비되었는데, 이는 『경국대전』에 기록된 표준 중량기의 종류(대칭 · 중칭 · 소칭)와 단위를 통해 알 수 있다. 다만 조선시대의 표준 중량기 단위인 근의 무게는 고려시대에 큰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인 1909년부터는 표준 중량기의 단위로 일본의 무게단위인 관과 돈이 새롭게 사용되었다. 이러한 단위는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다.
고려시대 표준 중량기의 종류는 알 수 없지만,『고려사』에 의하면 충렬왕 2년(1276) 고려가 원과 저울의 제도가 달라 원에게 16근의 저울과 10근 반의 저울 추 1벌과 3근 2냥 저울 추 1개를 받아서 전국에 사용하고 있는데, 아직 골고루 다 돌아가지 못하니 저울대와 저울추를 각각 500개를 원에 요청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고려시대 표준 중량기의 저울이 중국과 달리 독자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임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 표준 중량기인 저울은 세종대에 제도적으로 정비되었는데, 이 때 저울의 종류와 단위도 함께 완비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표준 중량기인 저울은 근대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누어 파악할 수 있다. 전자의 시기에는 분칭(秤), 즉 대저울과 천칭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후자의 시기에는 전자와 함께 판수동 저울 등이 널리 사용되었다. 표준 중량기의 유물은 각 박물관에 대저울이 많이 보관되어 있는데, 저울의 사용과 많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 이전의 표준 중량기는 斤 · 兩을 중심 단위로 무게를 측정하였다. 조선시대의 표준 중량기는 측정하는 무게에 따라 대칭 · 중칭 · 소칭으로 분리되었고, 무게의 측정 단위도 세분화하였다. 표준 중량기는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많은 변화를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