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울은 물체의 무게를 측정하는 데 사용하는 기구·기계·정치를 통틀어 하는 말이다. 크게 저울대와 저울추 혹은 접시로 구성된다. 종류로는 맞저울, 대저울, 앉은뱅이저울, 용수철저울, 약저울 등이 있다. 농경이 시작되고 무게를 계량하는 제도가 필요하게 되면서 제작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저울이 사용되었으며 고려 정종 6년(1040)에 저울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저울의 단위 무게가 기록되었다. 근현대시기의 저울은 미터법이 도입되면서 다소의 변화가 나타났다. 1964년부터 무게의 표준은 1근(16량)을 기준으로 600g으로 정하였다.
인간이 저울을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무게를 계량하는 제도가 필요하게 된 것은 농경이 시작되고, 공동체가 국가에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귀금속 · 보석 등에 가치를 두면서 비롯되었다. 이것들은 가치로서 취급해야할 양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계량 또한 주의 깊게 하였다. 또 의학 기술이 발전한 결과 약품을 사용하게 되고, 이를 위해서도 저울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경우 저울은 여러 자료를 통해 일찍부터 사용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고문헌에 무게의 단위들이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서』 율력지에도 ‘1약(龠)에 채워지는 기장 1,200톨의 무게를 12수(銖)로 하고, 24수를 1량(兩), 16냥을 1근(斤), 30근을 1균(鈞), 4균을 1석(石)으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저울은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일찍부터 사용하였을 것이다. 중국은 저울의 무게와 단위가 『한서』 율력지에 ‘약(龠), 수(銖), 냥(兩), 근(斤), 균(鈞), 석(石)’으로 정리되어 있고, 이후의 문헌 자료에도 정리되어 있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는 ‘근 · 량’의 용례 등을 고려할 때 저울이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사용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저울은 정종 6년(1040)에 새롭게 정비하였고, 이를 토대로 정종 12년부터 매년 봄과 가을에 걸쳐 중앙과 지방에서 각각 검사하여 저울의 부정행위를 막고자 하였다. 고려 후기는 원의 저울이 도입되어 약간의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저울은 세종 3년과 9년에 걸쳐 교정하였고, 이를 토대로 『경국대전』에 기록된 저울의 단위 무게가 확정되었다. 『경국대전』의 저울의 단위와 무게는 조선 후기에도 변함없이 사용되었다.
한편 근현대시기의 저울은 미터법이 도입되면서 저울의 단위와 무게에 다소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전에 사용되지 않았던 일본의 단위인 관과 돈의 단위들이 새롭게 사용되어, 이러한 단위들은 오늘날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초기부터 중국의 도량형제를 수용하였으므로 중국의 무게 단위들을 사용하였다. 『삼국사기』 · 『삼국유사』와 금석문 등의 자료에 ‘근(斤) · 냥(兩)’의 용례들이 기록되어 있고, 신라의 석제추, 통일신라시대의 경북 경주시 성동동 옛 절터에서 출토된 12지상이 정교하게 조각된 청동제 저울추의 존재와 충남 부여 구아리 · 가탑리 출토의 ‘일근(一斤)’이 기록된 용범 등을 고려할 때 무게의 단위는 중국과 유사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단위 외에도 상원사의 종을 만드는데, 놋쇠 3,300정(鋌)이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고, 정(廷) · 방(方) · 분(分) 등의 기록도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다양한 무게의 단위가 사용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용례들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1근의 무게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성덕대왕신종’을 만들면서 구리 12만근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근의 단위 무게를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저울은 ‘근 · 량’을 중심 단위로 사용하였으며, 이를 통해 금은과 같은 귀금속과 교역물을 측정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고려시대 저울은 정종 6년(1040)에 유사에게 명하여 권형(權衡, 오늘날의 저울)을 정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고려할 때 이 시기에 새롭게 정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종 6년 저울을 정비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초기를 거치면서 혼란이 있었고, 이러한 혼란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는 정종 6년 저울의 제도를 정비한 이후 정종 12년에는 매년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중앙의 경시서와 지방의 계수관에서 각각 저울을 검사하여 부정행위를 막고자 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저울은 11세기 중반에 정비되었고,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보협인석탑 탁본에 저울을 사용하는 모습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활발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도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경우처럼 무게의 단위는 『고려사』 · 『고려사절요』를 비롯한 문헌 자료에 ‘근 · 량’을 중심으로 기록되었음을 고려할 때 ‘근 · 량’을 중심으로 사용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다만 고려시대도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경우처럼 ‘근 · 량’ 외에도 ‘정(錠)’의 용례가 나타나는 점을 고려할 때 앞 시대의 단위들이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게의 단위인 ‘근 · 량’은 중국의 경우처럼 1근 16량이었다. 1근의 무게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자료가 없다. 다만 종과 반자 등을 만들 때 사용되어진 금속의 무게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고려시대 1근의 무게를 유추한다면 중국 당 · 송대의 1근의 무게와 유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는 중국의 저울이 전해져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남송 영종의 연호인 경원명(慶元銘, 1195~1200)의 저울추와 원대에 사용되었던 저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고려후기에는 『고려사』에 충렬왕 2년(1276) 고려가 원과 저울의 제도가 달라 원에게 16근의 저울과 10근 반의 저울 추 1벌과 3근 2냥 저울 추 1개를 받아서 전국에 사용하고 있는데, 아직 골고루 다 돌아가지 못하니 저울대와 저울추를 각각 500개를 원에 요청하였다가 저울 300개를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저울은 길이와 부피의 제도를 정비한 것처럼 조선 초기에 새롭게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조선초기에 고려의 저울과 함께 고려후기에 도입되었던 원의 저울이 함께 사용되어 상당히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세종 3년에는 공조에서 중앙과 지방의 저울이 부정하므로 바로 잡을 것을 건의하자 세종이 이를 허락하였고, 이듬해인 세종 4년에는 새 저울 1,500개를 만들어 보급하고 옛 저울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저울은 완전히 통일되지 못하였었음을 세종 9년 서울과 지방의 저울을 모두 교정하여 만들도록 한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전기의 저울은 세종 9년에 이르러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 9년에 교정된 저울의 단위 무게는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잘 알 수 없다. 다만 『경국대전』에 의하면 ‘황종관에 물의 중량 88분을 기준하였는데, 10리(釐)가 1분이고, 10분이 1전이고, 10전이 1량이고, 16량이 1근이고, 큰 저울(大稱)은 100근, 중간 저울(中稱)은 30근, 작은 저울(小稱)은 3근 혹은 1근이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조선초기에 교정된 저울의 무게와 단위를 이해할 수 있어 상당히 주목된다.
무게의 단위는 고려시대의 ‘근 · 량’ 앞에 ‘리 · 분 · 전’이 새롭게 추가되어 있고, 이러한 단위는 십진법으로 이루어졌다. 단위의 무게는 이전에 박흥수가 황종율관용수 88분을 35.307g으로 측정하였는데, 이를 기준으로 1분은 0.04012g, 1전은 4.0122g, 1량은 40.1218g, 1근은 641.946g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 『경국대전』의 저울 무게는 고려시대와 큰 차이가 없었고, 조선후기에도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고 조선시대의 저울은 정확한 저울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후기의 자료인 정약용의 『경세유표』에 의하면 ‘내가 일찍이 보니 동쪽 집 저울로 4근이던 솜의 부대가 서쪽 집 저울로는 12근이나 되더니, 시장에 팔려고 한즉 32근이나 되었으며, 관청에 들어가려 하니 무려 42근이나 나갔다. 그런데 이를 직조하는 집에 준즉 도로 10근이라 하는바 천하에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이러한 폐단을 없애려면 도량형을 한 관청에서 관장하게 하는 동시에 털끝 만큼이라도 잘못이 있을 때에는 ‘극률(極律)을 써서 그 사람은 죽이고 그 재물은 몰수하며 그 관원은 처벌하고 그 법령을 선포하여 온나라 백성에게 모두 이보다 더 엄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를 통해 조선시대 저울의 사용은 정해진 규칙에 의해 사용된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측면도 많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현재 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저울이나 저울추는 제각각인데, 추의 경우 더욱 심하여 재료나 크기 그리고 형태가 마음대로여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의하면 ‘어떤 이가 저울대를 뚫고, 그 빈곳에 둥 근 납덩이를 넣되 그 납덩이는 매끄러워서 굴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자기를 물건을 팔 때는 그 납을 몰래 굴러서 저울대의 머리 쪽에 오게 하여 무겁게 하고, 자기가 남의 물건을 살 때는 그 반대로 하여 값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근현대시기의 저울은 1902년 평식원의 설립과 함께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광무 7년(1903년) 7월 1일부터 36조의 ‘도량형규칙’을 통해 저울의 단위와 무게가 새롭게 제정되었다. 조선시대 저울의 단위인 대칭, 중칭, 소칭을 없애는 것만 아니고, ‘근 · 량’을 기본으로 ‘전 · 분 · 리’와 함게 ‘리’ 아래 ‘호(毫)’를 추가하였다. 미터법에 따라 무게의 단위도 그램(g)을 구람(久覽)으로 하고, 량을 기준으로 량은 37.5g으로 정하였다.
이러한 ‘도량형규칙’은 평식원이 혁파되면서 제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1905년 3월 29일 법률 제1호에 의해 ‘도량형법’으로 전환되었다. 도량형법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많이 변화되었다.
일본은 1909년 도량형법을 개정하여 조선의 도량형제의 단위를 일본의 도량형제의 단위로 바꾸었다. 저울의 단위는 량과 전을 삭제하였고, 대신 관(貫)을 기준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돈(匁)을 새롭게 사용하였다.
즉 저울의 무게와 단위는 관, 근(160/1,000관), 돈(1/1,000관), 분(1/10,000), 리(1/100,000), 호(1/1,000,000)이었고, 관과 돈은 우리의 전통적인 무게의 단위로 사용되지 않았던 단위들이 1909년부터 사용된 것이었다.
해방 이후 저울은 척관법폐지를 위한 계량법안이 국회 상공위에서 통과되었고, 1964년부터 무게의 표준은 1근(16량)을 기준으로 600g으로 정하였다. 이 때 돈도 3.75g으로 자연스럽게 사용하였다. 따라서 관과 돈 등의 저울의 단위는 빨리 소멸시켜야 할 것이다.
저울의 구조는 크게 저울대와 저울추 혹은 접시로 구성된다. 저울대는 형(衡)이라 하는데, 저울대 위에는 분 · 전 · 양 · 근 등이 새겨져 있다. 저울대에는 줄(繩)로 추와 접시를 매어단 것을 준(準)이라 한다. 저울추는 권(權)이라 한다.
저울의 종류는 맞저울, 대저울, 앉은뱅이저울, 용수철저울, 약저울 등이 있다. 먼저 맞저울은 천평칭(天平秤) 또는 천칭(天秤)이라고 한다. 가운데에 세운 줏대에 지렛대를 걸쳤으며, 양쪽 끝에 똑같은 크기의 저울판을 달고, 한 쪽에는 달 물체를 다른 쪽에는 추(분동)를 달아 평행을 이루게 하여 무게를 다는 것이데, 평행저울이라고 한다.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것은 맞저울로서, 서기전 5,000년에서 4,000년 사이에 이집트에서 오늘날 맞저울의 원리와 구조가 거의 같은 것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박지원의 『연행록』에는 중국 맞저울의 정확성까지 감탄하면서 술까지도 달아 파는 점을 부러워하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중국에도 맞저울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홍대용의 『담헌서』에는 ‘저울 양쪽 머리에 똑같이 접시가 달려있고, 그 중간을 장대 위에 걸어 놓는다. 장대 머리에는 직선이 그어져 있고, 저울 위에는 바늘이 설치되어 있는데, 바늘이 직선과 합치되는 것을 표준으로 한다. 그리고 따로 네모 난 추가 있는데, 크고 작은 여러 가지가 있어 근량 무게가 각각 새겨져 있다.
만일 은 한 냥을 달려고 하면 은을 한 접시 위에 올려놓고 한 냥 무게의 추를 다른 접시에 올려놓아 저을 바늘이 장대의 식선과 합치되도록 하면 된다. 저울을 낮추거나 올리거나 추를 밀거나 당길 수 없으므로 간악한 사람들이 재주를 부려 속일 수가 없다’고 소개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맞저울은 『담헌서』의 자료와 각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고려할 때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대저울[稱]이 있다. 대저울은 저울대에 눈금을 새기고, 물체의 무게에 따라 추를 눈금의 위치에 따라 움직여서 평행을 이루었을 때 무게를 알아내는 원리이다. 대저울은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까지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대저울은 기원전 200년경 이탈리아의 위로(Wiro)가 발명하였다고 전하는데, 로마저울이라는 서양이름은 이에서 비롯되었다. 대저울은 다양한데,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을 측정한다. 『경국대전』에 소칭, 중칭, 대칭의 무게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대저울의 존재를 의미한다.
소형 저울, 즉 소칭은 주로 약재나 금 · 은의 무게를 측정하는데 사용되었고, 이를 등자(等子) · 분칭(分秤)이라 한다. 중간 저울, 즉 중칭은 주로 곡물, 야채 등 생활용품을 측정하는데 사용한다. 대형 저울, 즉 대칭은 쌀가마, 보리가마, 돼지 등 무거운 물건을 측정하는데 사용한다.
셋째, 앉은뱅이저울이 있다. 앉은 저울 또는 대칭(臺秤)이라고 하는데, 용수철에 힘을 가하였을 때 일정한 비율로 줄어드는 원리를 이용한 저울이다. 저울판 위에 물체를 올려놓고 용수철에 의한 무게를 전달을 위쪽 저울대에서 추로 조절하여 알아내는 것으로, 물체를 사람이 매거나 들지 않고 바닥에 놓고 달 수 있어 편리하다.
미곡 상점의 경우처럼 무거운 쌀가마를 많이 달아야 하는 곳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한편 오늘날에도 용수철이 줄어드는 부분에 바늘을 달아서 무게를 측정하는 소형의 앉은뱅이저울을 많이 사용한다. 시장이나 식품점 등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저울몸 위에 저울판에 물체를 올려놓으면 바늘이 그 무게를 가리키는 저울이다.
넷째, 용수철저울이 있다. 부피가 작고 간편하게 이용되는데, 손저울이라고도 한다. 아래에 달린 고리에 물체를 달았을 때 용수철이 늘어나는 부분에 적힌 눈금을 보고 무게를 알라내는 저울이다. 이것은 사람이 손으로 들고 사용해야 하므로 20kg 내외의 물체를 측정하는데, 적당하다.
다섯째, 약저울이 있는데, 분칭(分秤) · 약형(藥衡) · 약칭(藥秤)이라고 한다. 아주 적은 무게를 측정할 수 저울로, 주로 약재를 달지만 금 · 은의 무게를 측정하는데도 사용한다.
저울의 제조 방법은 저울의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저울대, 끈 혹은 용수철, 저울 추(돌 혹은 금속), 저울 판 등을 준비하여야 하고, 이를 연결시켜야 한다. 저울대에는 자세한 눈금을 새겨 물건의 무게에 따라 추를 이동시킨다.
저울은 추의 무게에 따라 측정이 변할 수 있다. 따라서 저울은 제작에 상당한 기술력이 필요하다. 조선시대의 경우 저울은 공조에서 만들었는데, 이를 각 도에 내려 보내면 도에서 이를 복제하여 각 읍에 내려 보내 사용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도 저울은 무게 측정에 정확하지 않아 검인을 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저울은 종류에 따라 사용 방법이 다르다. 예를 들면 맞저울의 경우, 가운데에 세운 줏대에 지렛대를 걸쳤으며, 양쪽 끝에 똑같은 크기의 저울판을 달고, 한 쪽에는 달 물체를 다른 쪽에는 추(분동)를 달아 평행을 이루게 하여 무게를 측정한다.
반면 대저울은 저울대에 눈금을 새기고, 물체의 무게에 따라 추를 눈금의 위치에 따라 움직여서 평행을 이루었을 때 무게를 알아내는 원리로,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까지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저울은 민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전근대의 저울은 이불을 만드는 솜(면)을 측정할 때 널리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도 저울은 서민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소고기 가게에서 1근 소고기값 얼마라고 하면, 소비자는 ‘소고기 1근을 주세요’라고 한다. 하지만 가게는 1근의 무게를 정확하게 알리지 않고 가게에 따라 기준을 400g 혹은 600g으로 하여 소고기를 판매하였다. 가게의 주인은 1근을 400g으로 하고, 대신 값은 약간 내려서 판매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는 1근이 600g으로 생각하고 구매를 하고, 이 가게의 소고기 값은 싸다고 말한다. 실상은 1근의 무게를 정확하게 알리지 않고, 소비자를 현혹시켜 물건을 판매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1970 · 1980년대 너무나 보편적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