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 ()

평창 상원사
평창 상원사
불교
유적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에 있는, 통일신라 승려 보천과 효명이 창건한 절.
이칭
이칭
진여원(眞如院)
유적/건물
건립 시기
705년
소재지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상원사는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보천과 효명이 창건한 절이다. 통일신라시대 중대에 조성된 진여원 자리에 새로 확장하여 조성하였다.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의 기도처로, 오대산 문수 신앙의 중심지이다. 조선 전기 왕실의 원찰이 되었으며, 근대에 다시 중창되었다. 관련 문화유산으로 상원사 동종과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평창 상원사 목조제석천왕상 수습 복장전적, 평창 상원사 영산전 석가삼존·십육나한상 및 권속,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등이 있다.

정의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에 있는, 통일신라 승려 보천과 효명이 창건한 절.
창건 이후 고려시대까지의 연혁

705년(성덕왕 4)에 창건하여 진여원(眞如院)이라고 불렀다. 언제부터 상원사(上院寺)로 불렸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통일신라시대에 진여원을 창건하고 화엄 결사를 맺은 기록이 남아 있지만, 이후 고려 후기에 이르기까지는 진여원이나 상원사와 관련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일연(一然: 1206~1289)『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진여원이 곧 상원사라고 하였으므로, 적어도 고려 후기에는 상원사라는 사명을 사용하였다.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 1320~1376)의 제자 영로암(英露菴)이 상원사 승당(僧堂)이 터만 있고 전각이 없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였다. 이에 최백청(崔伯淸)과 부인 안산군부인(安山郡夫人) 김씨(金氏)가 후원하여 승당을 중창하였으며, 그해 겨울 선객(禪客) 33인을 모아 10년 좌선(坐禪)을 시작하였다. 중창한 지 5년째인 1381년(우왕 7) 5주년 기념 법회에서 승당에 나타난 이적을 목격한 중창주 김씨 부인은, 신심이 더욱 지극해져 토지와 노비를 시주하며 상원사가 영원히 존속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의 변천

조선 전기에 상원사는 강원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 중 하나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그 시작은 1401년(태종 1)의 주1 지정이었다. 그해 10월, 재해를 없애기 위한 수륙재(水陸齋)[^2]가 상원사에서 열렸다. 1395년(태조 4) 국행 수륙사로 삼화사와 관음굴, 견암사 세 곳을 지정하였으나 1414년(태종 14) 수륙사를 재조정하면서 삼화사가 제외되는 대신 상원사가 지정되었다. 그리고, 1405년(태종 5)과 1424년(세종 6) 사원과 사원 소속 수조지(收租地)와 노비가 대대적으로 정리되었다.

1424년 불교 교단을 선교 양종으로 정리하며 남긴 36개 사찰에 상원사가 포함되었다. 처음 36개를 지정할 때 상원사는 누락되었으나, 수륙사로 지정된 사찰을 제외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예조의 건의로 전주 경복사(景福寺) 대신 상원사가 교종의 18개 사찰 중 하나로 지정된 것이다. 태종 대의 수륙사 지정, 세종 대의 선교 양종 36사의 지정을 통해 상원사는 강원도 지역의 대표적이 사찰이 되었다.

상원사가 대대적으로 중창된 때는 세조 때로, 상원사는 세조의 원찰이 되었다. 1464년(세조 10) 세조의 병세가 악화하자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는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3]와 학열(學悅)에 자문을 하여 오대산 상원사를 중창하였다. 학열이 공사를 지휘하였다. 경상감사에게 명을 내려 쌀 500석을 강릉으로 운반하게 하였고, 제용감(濟用監)에서는 비단 1,000필을 내어 공사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상원사 중창 권선문(上院寺 重創 勸善文)」이 작성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신미는 학열과 학조(學祖) 등과 함께 국왕의 수복강녕(壽福康寧)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상원사를 중창한다며, 중창 불사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권선문을 지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조가 도움을 주기 위해 어명을 내린 것이 『어첩(御牒)』인데, 어첩은 한문본과 언해본 두 가지로 작성되었다. 어첩 다음에는 시주질이 있다. 세조와 세자 이름만 한문본과 언해본 시주질에 모두 기록되어 있고, 한문본에는 대군, 부원군을 비롯하여 중앙의 대소 신료와 지방 수령 등이 열거되어 있다. 언해본에는 세조비와 세자빈, 공주를 비롯하여 내명부와 외명부 여서들의 이름만 올라 있다. 1465년(세조 11) 3월에 시작된 공사는 이듬해에 완공되어 불전과 동서 상실, 나한전(羅漢殿), 청련당(淸蓮堂), 승당, 선원(禪院) 등 여러 건물이 들어섰다. 학열의 요청을 받아들여 왕실에서는 강릉의 갈대밭 수백 결을 상원사에 하사하였다. 갈대밭을 개간하여 논으로 만든 후 에서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게 한 것이다. 인수대비는 별도로 곡식 150석을 하사하여 탱화를 조성하게 하고, 왕실 조상의 제사 비용으로 60석을 시주하였다. 그리고 신미를 상원사 주지로 임명하였다.

1466년(세조 12) 세조는 금강산의 여러 절을 방문한 뒤 오대산에 들렀다. 세조의 오대산 순행에 맞춰 상원사 낙성식이 거행되었는데, 세조와 정희왕후, 세자, 호종하는 신료 등 많은 인원이 참여하였다. 이때의 행차와 관련한 2편의 설화는 오대산 상원사를 대표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하나는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平昌 上院寺 木造文殊童子坐象)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기도를 올리며 머물던 중 인근 계곡에서 목욕을 하였는데, 이때 등을 닦아 준 동자승이 상원사의 문수보살이었으며, 그동안 앓고 있던 괴질이 치료되었다는 전설이다. 이 전설은 유물과 연결 지어서도 이야기가 전하는데, 세조가 목욕을 하면서 어의(御衣)를 걸었던 관대(冠帶) 걸이가 실제로 남아 있다거나, 복장 유물로 나온 옷이 세조의 피고름이 묻어 있던 어의라는 이야기, 그리고 상원사 문수동자상의 얼굴이 바로 세조의 등을 밀어 준 동자승의 얼굴이라는 이야기 등이다.

또 다른 전설은, 세조가 상원사 법당에 들어가려는데 고양이들이 세조의 바짓자락을 물며 길을 막았고, 이를 이상하게 여겨 법당 안을 살펴보니 세조를 죽이려는 자객이 있었으며, 고양이들 덕분에 세조가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설화가 만들어지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이유는, 그만큼 세조의 원찰로서 상원사가 중요한 사찰이었다는 것이다. 상원사 측에서도 사찰을 유지하는 데 있어 세조와의 각별한 인연을 강조하였음을 의미한다.

상원사 문수전에 봉안된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제석천상, 선재동자상이 조성된 시기도 상원사가 세조의 원당이 된 세조 대이다.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은 세조의 등을 닦아 주었다는 동자승의 전설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왔으나, 복장유물에서 발견된 조성 발원문을 통해 그 연원이 밝혀졌다. 이 동자상은 1466년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懿淑公主)와 사위 정현조(鄭顯祖)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세조의 수복(壽福)을 빌고, 더불어 자신들에게 아들을 내려 주기를 발원하며 1466년 이전에 제작을 시작하여, 세조가 상원사 낙성식에 참여하기 전에 이미 복장 의식을 치렀음을 확인하였다.

세조가 죽은 후에도 상원사는 세조의 원찰로서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조선 후기까지도 매년 내관을 파견하여 세조 원당으로서 재를 올리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469년(예종 1) 예종은 선왕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관아의 문루에 걸려 있던 범종을 상원사로 옮겨 걸었다. 이 종은 지금도 상원사에 남아 있는데, 725년(성덕왕 24)에 주조하여 현존하는 한국 범종 중 가장 오래된 종이다.

또한 강원도와 내수사 등에서 발급한 문서들을 통해 상원사에 주어진 경제적 특권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상원사 성화 5년 강릉대도호부 입안(上院寺 成化 五年 江陵大都護府 立案)」, 「상원사 성화 13년 강릉대도호부 입안(上院寺 成化 十三年 江陵大都護府 立案)」, 「상원사 성화 17년 내수사 입안(上院寺 成化 十七年 內需司 立案)」 등이 세조 사후에도 계속된 상원사에 대한 지원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상원사 성화 5년 강릉대도호부 입안」은 1469년 강릉대도후부가 상원사에 발급한 입안으로, 상원사에 산산제언(蒜山堤堰)을 주고 여러 잡역과 염분세(鹽盆稅) 등을 면제해 준 문서이다. 이 산산제언은 1467년(세조 13) 상원사 공사가 끝난 뒤 세조가 신미에게 하사한 강릉부 산산제언이다. 예종은 즉위 후 세조의 원당인 상원사를 보호 지원하며, 제언이 신미에게 하사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다. 이 제언은 신미 이후 학열에게로 세습되었다.

「상원사 성화 13년 강릉대도호부 입안」은 1477년(성종 8)에 역시 강릉대도호부가 상원사에 발급하였다. 예종의 원찰인 낙산사(洛山寺)와 세조의 원찰인 상원사 모두 지계승인(持戒僧人)이 대를 이어 사찰을 이어 나갈 것을 확인해 준 문서이다. 「상원사 성화 17년 내수사 입안」은 1481년(성종 12) 내수사에서 발급한 문서로, 상원사가 낙산사보다 세입이 적으니 낙산사에서 거두어들인 포물(布物)과 면화(綿花) 절반을 상원사에 나누어 주라는 내용이다. 이처럼 상원사의 사원 경제의 상당 부분은 세조 대에 형성되었으며, 면세와 면역의 혜택도 수반되었다. 이는 예종과 성종 대에 계속해서 이어졌다.

조선 후기에도 상원사는 왕실 원당으로 운영되었다. 세조 외에 다른 왕실 구성원들의 천도를 위한 불사도 계속되었고, 이에 따른 사찰의 중수도 이어지며 사찰이 유지되었다. 1644년(인조 22) 상원사 전각이 퇴락하자 각해(覺海)가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1645년(인조 23) 5월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상원사 목조제석천왕상이 중수되었다. 그해 6월 13일 작성된 중수 발원문이 목조제석천왕상의 복장에서 발견되었는데, 소현세자, 선조와 인빈김씨(仁嬪金氏)의 3녀 정숙옹주(貞淑翁主)의 천도를 위해 소현세자의 딸 3인을 비롯하여 그들의 가족과 친지들이 동참하였음을 전한다.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에는 반현(班玄)이 나한전과 해회당을 중수하였다. 고종 대에는 현재 영산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가삼존상, 16나한상과 그 권속 총 21구가 상원사로 이전되었다. 1886년(고종 23)에 작성한 발원문을 참고하면, 1885년(고종 22) 봄 왕실에서 하사한 내탕금으로 영산전의 단청과 불상 이전 불사를 진행하였는데, 이는 경상북도 예천 천주산 운복사에 있던 불상과 나한상 등을 이운한 것이다. 영산전의 존상은 1958년에 2차 중수가 이루어졌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과 영산전(靈山殿), 종각 등이 있다. 선원은 청량선원(淸凉禪院)이라고 하는데, 오대산을 일명 청량산(淸凉山)이라고 하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관련 문화유산

지정유산으로 현재 상원사 경내에는 국보인 상원사 동종(上院寺 銅鍾)과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인 평창 상원사 문수전 목조동자상(3구)(平昌 上院寺 文殊殿 木造童子像(3軀))과 평창 상원사 목조제석천왕상 수습 복장전적, 평창 상원사 영산전 석가삼존 · 십육나한상 및 권속 등이 있다. 월정사성보박물관에는 보물인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平昌 上院寺 木造文殊童子坐像 腹藏遺物)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 복장전적(平昌 上院寺 木造文殊菩薩坐像 腹藏典籍), 국가민속문화유산인 세조대의 회장저고리 등이 있다.

참고문헌

원전

『목은집(牧隱集)』
『삼국유사(三國遺事)』
『식우집(拭疣集)』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촌집(陽村集)』
『오대산사적(五臺山事蹟)』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단행본

『오대산 월정사: 절, 산속에 피어난 이야기』(국립춘천박물관, 2023)
한상길, 『월정사』(대한불교진흥원, 2009)

논문

탁효정, 「조선시대 오대산의 왕실불교와 원당의 운영」 (『불교문예연구』 20, 동방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연구소, 2022)
유근자,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 목조제석천상의 연구」(『선문화연구』 30,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21)
유근자, 「오대산 상원사 영산전 존상의 복장 기록 연구」(『국학연구』 45, 한국국학진흥원, 2021)
곽뢰, 「신라 오대산문수신앙 연구」(동국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6)
최연식, 「『삼국유사』 소재 오대산 관련 항목들의 서술 양상 비교」(『서강인문논총』 44, 서강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5)
박성종, 박도식, 「15세기 상원사 입안문서 분석」(『고문서연구』 21, 한국고문서학회, 2002)

인터넷 자료

주석
주1

수륙재(水陸齋)를 올리는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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