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2월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17살 때인 1908년 3월 결혼했지만 남편이 제대로 돌보지 않아 20여 년을 시부모와 함께 살았다. 그러던 중 목포 북교동성결교회에서 기독교에 입문하고 경성성서학원에서 공부하였다.
1932년부터 신안군 지역을 순회하며 증동리교회를 중심으로 진리교회와 대초리교회 등 여러 교회들을 설립했다. 그는 지역을 순회하는 도중 주민들의 부탁으로 우체부의 역할도 했고, 여러 섬들을 왕래하느라 1년에 아홉 켤레나 고무신을 바꾸어 신었다고 한다.
1943년 일제의 신사참배가 증동리교회에도 강요되었을 때,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목포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지만 저항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신안군 도서 지역은 좌익들의 활동이 강했고, 6 · 25전쟁 중에는 섬 전체를 인민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목포인민위원회에 끌려갔던 문준경은 이성봉 목사 등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증도로 돌아왔는데, 이는 자신이 돌보고 있던 교인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 10월 4일 국군이 증도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좌익들이 교인들을 처형하기 시작했고, 문준경 역시 1950년 10월 5일 총살당했다.
현재 문준경의 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신안군 증도면사무소 옆 증동리교회에 문 전도사의 추모비가 있다. 그의 무덤도 증동리교회 뒷산에 있었지만, 2005년 그의 순교터인 증동리교회 앞바다로 이전했다. 2013년 문준경의 순교기념관이 신안군 증도면에서 개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