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양동교회 ( )

개신교
유적
국가유산
1898년 선교사 유진벨이 목포에 설립한 교회.
이칭
이칭
목포교회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목포 양동교회(木浦 陽洞敎會)
분류
등록문화유산/기타/종교시설/종교시설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가등록문화유산(2004년 12월 31일 지정)
소재지
전남 목포시 호남로 15 (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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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98년 선교사 유진벨이 목포에 설립한 교회.
개설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현, 국가등록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898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벨에 의해 설립된 목포양동교회는 1919년 3월 21일에 일어난 목포 3 · 1만세운동의 중심지였다.

역사적 변천

1898년 봄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벨은 목포 양동에 임시주택을 짓고 한국인들과 함께 예배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목포양동교회의 출발이다. 동년 11월 목포에 도착한 의료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의 진료 활동으로 교회는 더욱 성장하였다. 1900년 8월 첫 세례식이 있었고, 1903년에는 300여 명의 교인들이 힘을 합쳐 예배당을 건립하였다. 1906년 목포 지역의 부흥운동으로 교세(敎勢)가 확장되자 교인들이 다시 교회당을 짓게 되면서 1911년 석조예배당을 완공하였다.

내용

1919년 3 · 1만세운동 때 이경필 목사를 비롯한 교인들이 같은 선교 구내의 영흥학교 · 정명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준비했고, 3월 21일 일어난 목포만세운동은 이들이 주도했다. 당시 시위에 참가한 200여 명은 대부분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교인 서상술과 박상봉은 일제가 휘두른 칼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 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박연세는 일제의 신사참배정책에 항거하다 투옥되어 1944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박 목사는 1977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고, 그의 유해는 1988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특징

1911년 준공된 목포양동교회 예배당은 전형적인 서양식 조적조 건물로서 1982년 한차례의 증축과정을 거쳐 계속 사용 중이다. 예배당 왼쪽 출입구 위에는 “大韓隆熙四年(대한융희4년)”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건물 옆에는 ‘선교107년 기념비’와 ‘순교자 박연세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믿음의 흔적을 찾아-한국의 기독교 유적』(송현강·이순자·이진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1)
『한국기독교의 역사』Ⅰ(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기독교문사, 2011)
『예수 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이덕주, 진흥,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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