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교회는 1891년 호주 선교부에 의해 좌천동에 설립되었다.당시 호주 선교사들은 1905년 교회 바로 옆에 일신여학교를 세워 여성교육에도 앞장섰는데, 1919년 3·1운동 때 부산진교회의 교인이자 이 학교의 선생들의 주도하에 여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부산 지역의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부산진교회 아래에는 1952년 호주 선교사들에 의해 문을 연 일신기독병원이 자리하고 있다.
부산진교회는 1891년 내한한 호주 여선교사 멘지스(Belle Manzies)에 의해 세워졌다. 멘지스는 부산진교회와 일신여학교를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1924년까지 30여년을 전도와 교육 사업에 헌신하여 후배 선교사들로부터 ‘호주 선교부의 어머니’라 불릴 만큼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1900년 10월 엥겔(George O. Engel) 선교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그는 남자교인들을 모아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또한 수요기도회를 시작하여 평신도들에게 인도를 맡겼다. 초읍교회와 지곡교회를 개척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1919년 3월 11일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부산진교회의 교인이었던 주경애·박시연 선생의 지휘에 따라 태극기를 들고 기숙사를 나와 좌천동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다. 만세 시위는 약 2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결국 두 선생과 학생들이 검거되었다. 결국 주경애·박시연 선생은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았고, 11명의 학생이 6개월 징역형에 처해졌다. 이에 맞서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그 후 10일간 동맹휴학으로 맞서 일제에 저항하였다. 이 같은 일신여학교의 항거는 그 후 경남지역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현재 부산진교회 바로 앞에는 호주 선교부에서 1905년 건축한 일신여학교 건물이 남아 있는데, 지난 2003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또 교회 아래에는 호주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일신기독병원이 자리하고 있다. 부산진교회는 일신여학교·일신기독병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지역 근대화에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