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교육 ()

내훈
내훈
개념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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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개설

여성교육은 그 시대와 사회의 여성관, 여성의 사회적 지위 등에 따라 기본사상이나 교육실태가 좌우되어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여성은 남성과 다른 교육을 받아왔으며, 그것은 성역할(性役割)의 구분에 따른 것뿐만 아니라 더 크게는 성적 차별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를 살펴보면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교육제도를 마련,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지만 여성은 이러한 제도적인 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였으며, 조선시대까지 전통사회에서의 여성교육은 가정을 중심으로 한 비형식적인 교육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나마 지적인 면은 제외되고 오직 가사기술과 유교정신에 입각한 여성으로서의 덕육(德育)만이 강조되어 왔다. 조선시대에 비하면 고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남성과 여성의 차별에 있어 비교적 자유롭고 관대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으나, 제도적인 교육에 있어서는 여전히 여성은 제외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일부 양반계급에서는 여성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지만,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그러한 학문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 역시 철저한 남존여비사상에 기초하여, 여성에게는 독립적인 인격이나 법적인 권리가 부여되지 않은 남성의 종속물로서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80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문호개방과 함께 신교육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여성교육에 대한 중요성이 점차 뿌리를 내려가면서 여성의 사회도 참여와 교육기회가 크게 확대되었다. 광복과 함께 현재의 학제로 정비되면서 여성의 교육기회는 대학까지 완전히 균등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급격히 향상되어 현대에 이르러서는 학교교육·사회교육·가정교육 등 교육 전반에 있어서 남녀의 역할구분에 따른 차이는 있을지언정 성적인 차등은 거의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구문물의 무비판적 도입과 함께 과열된 진학 경쟁으로 인한 학교교육, 그 중에서도 지식 위주의 교육 중심으로 흐르게 되어 우리 나라의 전통적 여성교육에서 되살리고 이어 나가야 할 여성으로서의 덕목에 관한 내용은 학교는 물론 가정과 사회에서도 점차 외면당하여 왔다. 이에 대한 반성과 자각으로 여성교육 및 교육전반에 있어서 전인교육에 대한 중요성이 계속 강조되고 있으나 제도적인 모순의 해결과 함께 더 근본적인 대책과 노력이 필요한 실정이다.

전통시대의 여성교육

삼국∼고려시대의 여성교육

우리 나라의 여성은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조선시대 여성들에 비하여 자유롭고 독립된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고대의 가족제도를 살펴보면 부계(父系)보다 모계(母系)에 치중하였으며, 혼인에서도 혼례 뒤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사는 데릴사위제도가 일반적이었다.

또한 고구려의 혼속(婚俗)은 『삼국지』 동이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남녀동등의 권리를 기본으로 삼은 자유결혼이 성하였고, 신라에서도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결혼을 한다.”고 하여 조선시대와는 크게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신라에 3명의 여왕이 있었던 사실도 비록 골품제도에 따른 것이라 하지만 남녀차별이 없었음을 나타내어 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라에서는 화랑단체(花郎團體)의 최초 시험기에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두 여성을 지도자로 삼았다. 이는 당시 신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잘 반영해주는 것으로 신분과 교양이 갖추어진 여성이 평민계급의 소년을 지도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시대성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여성의 생활은 대단히 자유로워 솔직하고 자유로운 남녀관계가 이루어졌으며, 가계계승에 있어서도 남손(男孫)이 없을 경우에는 여손, 즉 외손도 가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여성의 교육에 있어서는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으나, 이러한 당시의 사회풍조로 보아 태학(太學)이나 경당(†唃 등 교육기관에 있어서의 교육은 받지 않았더라도 조선시대처럼 교육의 기회나 내용에 많은 제약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와서는 외적의 침입, 정변과 반란, 공녀제도(貢女制度) 등으로 여성들이 자연 규방에 숨어버리면서 조혼(早婚)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 말 조선 초에 성리학이 전래되면서부터 유교적인 남존여비사상이 사회에 만연하게 되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저하되었다.

조선시대의 여성교육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여성들이 학문을 닦는 것은 부도(婦道)에 어긋나는 일이라 보았다. 공자는 『논어』 양화편(陽貨篇)에서 “여자와 소인은 가르치기가 어렵다.”고 하였고, 『천자문』에서도 남자에게는 재주를, 여자에게는 정절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내외법(內外法)과 ‘여자나이 10세면 출입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거의 외출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성을 위한 제도적 교육기관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이와 같이 남녀는 어릴 때부터 다르게 자라왔으며 남녀의 역할이나 책임이 엄격히 구분된다는 의식은 가족관계에서 더욱 굳어져 전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었다. 이에 따라 여성교육은 자연 가정교육에 국한되어 유교정신에 입각한 가내범절과 서도(書道)·그림 등의 정서교육 및 약간의 학문을 배우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교육도 사대부 가정에서만 행하여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은 거의 문맹상태에 있었다.

세종 때에 와서 훈민정음이 제정, 반포된 이후 여성들도 가정에서 우리말 문자교육을 받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점차 한글을 체득한 여성들이 늘어났으나 여성에 대한 인식이나 여성에게 요구하는 덕목은 여전히 보수적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18세기 실학사상에서도 다름이 없었는데, 그들 역시 내업(內業)과 외업(外業)을 분명히 구별하여 내업을 충실히 해야 할 여자가 외업의 일부가 되는 독서와 강의(講義)를 해서는 폐해가 많다고 하였다.

여성교육에 관한 이러한 경향은 전근대적인 사회에서는 어느 나라의 교육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가정생활을 위주로 하여 여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부덕을 습득하는 가정교육, 현장교육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여성교육의 내용을 고찰해보기로 한다.

조선시대 초기의 여성교훈서는 대부분 중국의 것이었다. 즉 『여계 女誡』·『여논어 女論語』·『내훈 內訓』·『여범 女範』·『열녀전』·『명감 明鑑』·『소학』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교훈서는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문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여성들로서는 이해하기가 힘이 들었다. 이에 세조의 맏며느리였던 소혜왕후(昭惠王后)는 여성들이 쉽게 읽고 익힐 수 있는 교양서적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앞의 『열녀전』·『소학』·『명감』 및 『여교 女敎』 등의 책을 참고로 하여 우리 나라 실정에 알맞은 여성교훈서인 『내훈』을 만들었다.

내용은 ① 언행, ② 효친, ③ 혼례, ④ 부부, ⑤ 모의(母儀), ⑥ 돈목(敦睦), ⑦ 염검(廉儉)의 도리를 설명하였으며, 먼저 한문에 한글로 현토(懸吐)하여 엮은 다음 한글로 국역하였다. 따라서 소혜왕후는 조선시대 여성교육의 개척자이며 한글 옹호자라고 말할 수 있다. 중기 이후의 여성교훈서로는 이황(李滉)의 『규중요람 閨中要覽』, 송시열(宋時烈)의 『계녀서 戒女書』, 이덕수(李德壽)가 합본, 국역한 『여사서 女四書』, 이덕무(李德懋)의 『사소절 士小節』 등이 있었다.

이들 여성교훈서는 한결같이 여성교육의 목표를 현모양처의 교육적 인간상에 두고, 부덕(婦德)·부언(婦言)·부용(婦容)·부공(婦功) 등 여유사행(女有四行)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소혜왕후의 『내훈』에 따르면, 여유사행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① 부덕이란 재질이나 총명보다 맑고 조용하고 정정(貞靜)하며, 수절정제(守節整齊)하여 제 몸가짐에 좋고 부끄러움을 가리고 움직임과 멈춤에 법도가 있는 것이라 하였다. ② 부언은 말을 잘하는 것보다 말을 가리어 할 줄 알되, 나쁜 말과 남이 싫어하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 것이다.

③ 부용은 얼굴을 꾸미는 것보다 몸과 얼굴을 깨끗이 하며 옷을 깔끔하고 청결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고, ④ 부공은 재주보다 길쌈에 전심하며 주식(酒食)을 깨끗하게 만들어 봉빈(奉賓)을 잘 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덕무의 『사소절』에서는 여유사행을 강조하면서 덕(德)은 정순(貞順)해야 하고, 언(言)은 사양하며 남의 말에 따라서 대답해야 되고, 용(容)은 조용하며 부드러워야 하고 공(功)은 사마(絲麻)에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여성교훈서와 당시의 자료들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시대 여성교육의 내용을 대략 다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숙(貞淑)·정렬(貞烈) 및 올바른 정조관을 가르쳤다. 여성의 정절은 고대사회 때부터 찬양을 받아 여성의 으뜸가는 미덕으로 다루어져 왔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성종 16년(1485) 『경국대전』에 이러한 내용을 편입시켜 법규화되기까지에 이르렀다.

그 이전인 세종 16년(1434)에는 고금의 정녀(貞女)·열녀의 행적을 골라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를 편찬하여 모든 여성들에게 정절의 덕을 교화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여성들에게 정절을 가르치고 이를 지키도록 훈련하여, 조선시대에는 많은 열녀비가 세워졌다.

특히 난을 만나 적병에게 수모를 당한 여성들이 여자로서의 몸가짐과 정절을 잃었다고 생각하여 자결한 사람이 많았는데, 임진왜란 때 전국의 효자·충신·열녀의 숫자를 비교하면 전체 434명 중 열녀가 356명을 차지하여 압도적인 수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에 있어서 여성의 정조관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되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둘째, 한 집안의 여인으로서 효친하는 며느리, 경순인종(敬順忍從)하는 아내, 시가의 친척과 화목하게 지내는 도리를 가르쳤다. 전통사회의 대가족제도에서는 출가하는 딸보다는 집안에 들어오는 며느리를 더 중히 여겼기 때문에 여성의 효도도 친부모 이상으로 시부모를 모실 것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자부(子婦)의 시부모에 대한 효행을 인과응보의 결과론적인 관계로 타이르며 노후에 자신의 자부로부터 그러한 관계를 형성하게 됨을 강조하면서 시부모에 대한 공경과 복종, 인내로 효성을 다할 것을 말하였다.

남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순종을 가장 큰 미덕으로 보았으며 공경하고 예를 잃지 않을 것을 가르쳤다. 또한 시가식구 및 친척들과는 화목하게 지내어 한집안을 화평하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

셋째, 제사를 지성껏 받들 것과 손님을 접대하는 예절을 가르쳤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여자의 교육은 조석 공궤(供饋:음식을 줌)와 봉제(奉祭:제사를 받듬) 및 접빈의 예절이면 족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상을 지성껏 받들고 모시는 마음가짐에서부터 제사의 모든 준비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교육이 실시되었는데, 이러한 봉제는 여성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업 중의 하나였다. 또한 집안에 찾아온 손님을 소홀히 대하는 것을 커다란 실책으로 보고 빈부에 차별 없이 정성껏 대접하는 것을 여성의 의무로 가르쳤다.

넷째, 가사기술과 근검절약을 가르쳤다. 바느질·길쌈·부엌일 등의 가사기술은 사대부의 가정에서부터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여성이면 누구나 습득해야 할 일이었다. 따라서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친척아주머니 등에게서 이러한 일들을 보고 들으며 몸에 익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과로 계속되었다.

이러한 가사솜씨는 혼인 때의 중요한 조건이 되기도 하여 남자 쪽에서 가사기술이 좋은 색시감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살림을 맡아 계획하고 쓰는 것이 여성의 역할이었으므로 특히 부지런하고 검소할 것을 강조하여 가정경제를 잘 꾸려나갈 수 있도록 가르쳤다.

다섯째, 육아법과 자녀교육에 관한 몸가짐과 태도 등을 가르쳤다. 특히 한 집안의 앞날을 이끌어갈 자손을 올바르게 양육하는 어머니의 임무에 큰 비중을 두었으며 매우 상세하고 많은 내용으로 이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태교(胎敎)부터 시작하여 출생 후의 금기사항 및 육아법, 유아 및 아동기의 각 단계별 교육에 대한 상세한 가르침이 시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여러 어른들로부터 습득되었으며, 육아법에 관한 여성교훈서들이 많이 읽혀졌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여성교육의 내용은 수신(修身)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사기술, 출가 후의 시부모와 남편과 시가 친척에 대한 예, 제사를 모시는 도리, 육아와 자녀교육, 가정관리 등에 이르기까지 교육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가정을 화목하고 평화롭게 이끌어갈 수 있는 현모양처의 여인상에 최대의 가치를 두고 이를 목표로 한 교육이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의 여성교육

근대적 여성교육의 성립

1870년대에 개항을 시작하면서 해외의 새로운 근대문화에 접하게 되는 개화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육에 있어서도 유교적인 전통교육제도를 부정하고 여자와 서민을 포함한 모든 국민에게 교육의 기회를 개방하였으며,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유학중심에서 과학중심으로 교육내용을 개편하는 등 교육의 근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여성교육을 인식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화사상에 힘입어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 근대적 여성교육의 출발기라고 할 수 있다. 유교적 보수성이 깊이 뿌리내린 사회에서 여성을 위한 학교의 설립은 쉽게 실현되지 못하였으며, 이에 초기 여성교육기관의 설립은 기독교 선교사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1885년(고종 22) 6월에 이 땅을 밟았던 감리교의 여자 선교사 스크랜턴(Scranton, M. F.)은 선교사업의 중요한 분야로 교육기관을 세울 것을 결심하고 그 준비에 착수, 1886년 5월경에 여학생 하나를 상대로 학교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梨花學堂)으로서 당시의 보수적인 인식으로 인하여 학생모집이 매우 힘들었으나 1899년에 47명, 1909년에 174명으로 점차 증가하였다.

그뒤 1894년에는 평양에 정의여학교(正義女學校)가 설립되어 지방 여성교육의 효시가 되었으며, 1897년 선교부의 지방학교 설치에 관한 정책이 결정되자 전국 주요 도시마다 기독교계 여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즉 1895년 서울에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와 부산 동래에 일신여학교(一新女學校), 1896년 평양에 숭현여학교(崇賢女學校), 1897년 인천에 영화여학교(永化女學校), 1898년 서울에 배화여학교(培花女學校) 등 많은 여학교들이 설립되었다.

국권상실 이전인 1909년까지 설립된 기독교계통의 여학교의 교육방침은 ‘보다 나은 한국인’이라는 전제 아래, 우리 나라의 실정과 생활환경에 알맞은 여성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기독교에 의한 우리 나라 근대 여성교육의 창시는 근대화의 초기단계에서 이에 적합한 여성교육을 모색하고 있을 때에 근대식 학교를 설립하여 그 모형을 제시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 및 일반인들의 여학교 설립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특히 우리 나라 여성들에게 전통적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계급을 타파하고 남녀평등사상을 일깨우며,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의식을 심어주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정부에 의한 여학교의 설립은 1895년부터 시작된 각종 근대식 교육기관의 설립에도 불구하고 외면을 당해오다가 『독립신문』을 비롯한 찬양회(讚揚會) 등의 부녀단체에서 여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계속적인 건의를 거듭하여 마침내 1895년 5월에 <여학교관제>가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학부대신 등 정부의 보수적인 교육정책에 따라 이 관제는 공포되지 못하였으며 관립여학교의 설립도 지연되었다.

그러다가 1908년에 <고등여학교령>을 공포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고등여학교의 설립목적은 “여자에게 필요한 고등 보통교육 및 기예를 교수함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 법령은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신교육이 수용된 이래 여성교육을 위한 최초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정부는 이 법령에 따라 1908년 4월 한성고등여학교(漢城高等女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어윤적(魚允迪)을 임명하였다. 이때 순종비는 한성고등여학교에 휘지(徽旨)를 내려서 이를 격려하기도 하였다. 학교의 편제는 3년제의 본과, 2년제의 예과와 기예전수과로 나누었는데 개교 1년 뒤에는 본과 90명과 예과 68명의 재적수를 나타내고 있다. 민간인이 설립한 사립여학교는 1897년경 김씨(金氏) 성을 가진 한 민간인 여성에 의하여 서울에 설립된 정선여학교(貞善女學校)가 최초이다.

1898년 9월에는 찬양회라는 부인회가 조직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우리 나라 근대여성사에 있어 최초의 여권선언이라 말할 수 있는 <여학교 설시통문>을 발표하였으며, 같은해 12월에 여학생을 모집하여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라 칭하면서 부인회 임원들이 직접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1905년 이른바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이에 대한 거부와 함께 국민의 교육열이 급상승하였다.

이는 애국열과 직결되는 것으로, 교육구국(敎育救國)의 인재요망은 남자뿐만 아니라 여성의 교육에까지 확산되어 민간인에 의한 여학교의 설립이 활발해진 것이다. 당시의 여성들은 ‘배우는 것이 힘’이라는 신념 하에 직접 교육사업에 종사하거나 여성교육단체를 조직하였는데, 진명부인회(進明婦人會)·여자교육회·양정여자교육회(養貞女子敎育會) 등이 그것이다.

이후 태평동여학교(太平洞女學校)·진명여학교·숙명여학교(淑明女學校)·양규의숙(養閨義塾)·명진여학교(明進女學校) 등 많은 여학교가 애국여성단체 또는 애국지사들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한편 이러한 개화기 여성교육의 실태를 살펴보면 몇몇 재단이 튼튼한 학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학교가 소규모로 운영되어, 학교당 평균 학생수는 10∼30명이 많았다. 또한 기숙사시설을 갖추고 무상교육을 실시하였으며, 관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학교가 초중등교육을 겸하여 실시하였다. 연령은 7, 8세에서 20세가 넘는 학생이 있었고 학교의 분위기도 가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교과과정에 있어서 초기기독교계 학교는 성경과 교양을 위주로 하였다가 점차 학과목을 정비하여 나갔으며 교과과정이 대체로 정비된 1908년의 한성고등여학교와 이화학당의 교과과정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한성고등여학교의 본과 교과과정은 수신·국어·한문·일어·역사·지리·산술·가사·재봉·도화·음악·체조·수예·외국어 등이었고, 이화학당의 고등과 교과과정은 성경·한문·대수·기하·삼각·천문학·지문학·심리학·교육학·물리·화학·영문학·만국지지·고등생리·경제·역사 등이었다.

이를 비교해보면 설립된 지가 오래되고 외국인교사가 많은 이화학당의 교과목은 전문적이고 다채로우며 한성고등여학교는 기본적인 과목에 한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립여학교의 설립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1905년 이후에는 각 여학교마다 전국적으로 운동회를 실시하여 민족정신 함양을 위한 한 방법으로 큰 효과를 거두었다.

1907년 5월에는 장충단에서 여학교연합대운동회가 처음으로 열렸으며 1908년에는 한 해 동안 연합운동회가 네 차례나 열리는 등 운동회를 통한 민족의 단결과 자주정신 고취를 실현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나라 근대여학교의 성립과정은 관학보다 사학(私學)이 먼저 설립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기독교계 학교가 민간인 학교보다 먼저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교육이념이나 교육내용에 있어서는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여성교육과는 거리가 멀며 교육시설이나 방법에 있어서도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들 근대여학교의 설립은 유교적 전통의 제약에서 탈피하여 여성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고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일깨우게 한 점 등에서 우리 나라 교육사 및 여성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여성교육

1910년 국권상실 뒤의 여성교육은 그 기본이념에 있어 이중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즉 일제의 한국에 대한 여성교육정책은 철저한 복종형의 여성상을 목표로 하고 있음에 반하여 국가적 위기에 처한 우리 민족의 의식은 남녀평등사상 아래 자주적인 교육구국을 구현하기 위한 여성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1911년에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여성 중등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치하였다.

수업연한은 3년이었으며, “여자에게 고등한 보통교육을 하는 곳으로서 부덕을 기르고 국민된 성격을 도야하며 생활에 유용한 지식과 기능을 가르친다.”라고 그 성격을 규정하였다. 또한 본과 외에 3년 이내의 기예과를 두어 재봉 및 수예를 전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1911년과 1915년에 각각 <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하여 사립학교의 설립에서부터 교육내용·교육시설에 이르기까지 규칙을 제정하여 감독을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1912년 숙명여학교와 진명여학교가 각각 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계 여학교들은 성경교육 및 종교의식을 금지시킨 법규 내용에 반대하여 여자고등보통학교로의 개편을 거부하였으나, 일제는 끝까지 종용하여 1913년에 이화학당, 1918년에 호수돈여학교, 1920년에 정의여학교 등 많은 여학교가 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당시 여자고등보통학교 본과의 학과목은 국어 및 한문·일어·역사 지리·산술·이과·가사·도화·재봉·음악·체조·수예 등을 과하였다. 1919년에 거국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여성교육사에서도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3·1운동 당시 수많은 여성 선각자들과 여학생들이 남학생 못지 않게 항일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여성에 대한 사회적 각성의 계기가 되어 사회참여는 물론 여성교육의 이념도 평등을 지향하여 진일보하게 된 것이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중반까지의 시기는 사회 전반에 걸쳐 계몽주의적 기운이 만연하였으며 여성의 교육에 있어서도 교육기회의 확대 및 고등교육의 실시 등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이다. 학제상으로는 1922년의 제2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여자고등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4년 또는 5년으로 연장하였으며, 1925년에 이화학당 대학과가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되고 1928년에 조선여자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되어 극소수나마 여성의 고등교육이 시작되었다.

참고로 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의 학생수를 보면 1919년에 378명에서 1935년에 2,256명으로 증가하였다. 한편 1931년에는 김활란(金活蘭)이 콜롬비아대학에서 교육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획득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여자박사가 탄생하였으며, 1933년에 고황경(高凰京)이 사회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뒤 1938년에 일제는 다시 제3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식민지교육정책을 강화하였으며 이에 따라 종래의 여자고등보통학교를 고등여학교로 개칭하였다. 그뒤 일제 말기로 접어들면서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정상적인 교육이 실시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여러 수단으로 강제동원되는 등 암흑기를 거치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여자고등보통학교·전문학교 등의 교육기관 외에도 보통학교·간이학교·실업학교·실업보습학교·사범학교·각종학교 등 여러 가지 유형의 교육기관에서 여학생들이 교육을 받아왔다. 이들 초등교육기관에서 고등교육기관까지를 모두 합하여 재학중인 여학생수를 연도별로 살펴보면 1925년에 8만439명, 1931년에 10만9314명, 1935년에 17만7337명이었다.

한편 1920년대 이후에는 학교교육 외에 계몽운동·애국운동 등의 차원에서 여성교육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각종 민족운동단체를 중심으로 하여 여성선각자 및 여학생들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습회·강연회·야학 등을 통하여 계몽운동과 민족의식 고취에 활발히 활동하였다. 또한 농촌 및 교육의 기회를 얻기 어려운 여건에 있는 여성들에게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근대적 교육과 민족정신 함양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정규학교 이외의 각종 교육시설 및 조직을 통한 학교 외의 교육활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어서 실질적으로 보다 중요한 교육의 일면을 담당하였다.

광복 이후의 여성교육

광복 이후 우리 나라의 여성교육은 정초기와 혼란기 속에서도 그 터전을 구축하여 많은 발전을 이룩하여왔다. <대한민국헌법>에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하여, 성·연령·계층에 관계 없이 누구나 교육의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음을 명시하였다.

1999년 현재 전체 학생 중 여학생의 비율은 44.89%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광복 당시부터 1999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교육은 초중등교육기관의 취학에 있어서는 남자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으나 대학과 대학원 등의 고등교육기관에서는 아직까지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즉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서는 전체 학생 중 여학생이 47∼49%를 차지하고 있으나 4년제 대학은 35.26%, 대학원은 32.49%에 불과한 실정이다. 반면 초등학교 교사의 여성화 현상에 따라 고등교육기관 중 교육대학만 여학생이 72.84%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교육단계별로 살펴보면 먼저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의 정착에 따라 남녀 모두 1960년대에 90% 이상의 취학률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재는 거의 100%가 달성되어 교육기회에 있어 성별차이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여학생수를 살펴보면 1999년 현재 초등학교 재학생 총 393만5537명 가운데 여학생은 185만9349명으로 47.24%를 차지하고 있다.

중학교는 1966년경 여학생의 중학교 취학률은 33%였으며, 1970년 46.5%, 1975년 67%, 1980년 92.6%, 1999년 99.9%를 나타내고 있다. 1999년 현재 중학교 재학생수 총 189만6956명 가운데 여학생은 90만7279명으로, 전체의 47.82%를 차지하고 있다.

고등학교는 1966년경 여학생의 취학률이 19.6%에 불과하였으며, 1970년에 24.1%, 1975년에 35.8%, 1980년에 62.2%, 1999년에 99.38%를 나타내고 있다. 1999년 현재 일반계고등학교는 재학생수 총 139만9389명 중 여학생은 66만2814명으로 전체의 47.36%를 차지하고 있고, 실업계고등학교는 재학생수 총 85만1751명 중 여학생은 41만8809명으로 전체의 49.17%를 차지하고 있다.

고등교육기관에 있어서는 4년제 일반대학의 경우 총학생수 158만7667명 가운데 여학생은 55만9836명으로, 전체 대학생수의 35.26%에 불과한 실정이다. 대학원생 역시 전체 22만4773명 중 여학생이 6만6529명으로 29.59%의 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대학진학에 있어 여학생들은 남녀공학의 진학이 저조하였으나 차차 그러한 경향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예년에 없었던 여성들의 급격한 남녀공학 선호현상으로 서울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나타난 변화의 물결이었다. 뿐만 아니라 각 대학의 수석합격자 중 여학생들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여학생들의 급격한 남녀공학 선호현상과 수석합격증가 등의 현상은 여권의 신장추세와 남녀동등권 실현이라는 시각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학력여성의 증가라는 고무적인 현상에 있어 제도적인 개선과 함께 여성 자신의 인식에 있어서도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다. 즉 우리 나라의 사회구조가 인습적으로나 법적으로 고학력여성들의 수용에 많은 제약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그만큼 차별과 편견이 있다는 문제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막연히 남성들의 탓으로만 돌려서도 안 될 문제라는 것이 제기되고 있다.

여대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및 대졸여성들의 실체를 분석해 보면 많은 여성들이 졸업 후 몇 년 동안만 직장생활을 하며 결혼 후에는 대부분의 여성이 대학에서 배운 전공을 그대로 사장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남성들과 치열한 경쟁을 거쳐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인력이 이처럼 사장된다면 개인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며 낭비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점에서 정부는 이들 고급여성인력의 수용을 위한 제도적인 뒷받침을 마련하여야 하며 사회적으로도 여성에 대한 편견을 하루빨리 불식하는 한편 여성 자신들도 고등교육을 받는 목적의식과 자세를 보다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다. 또 한가지는 많은 우수학생들이 남녀공학으로 점차 이전되고 있는 현상을 감안할 때 여자대학들은 ‘금남(禁男)’을 단계적으로 해제하여 공학으로 바꾸는 등의 보완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남녀동등권사상의 물결에 따라 ‘남성의 가정화’, ‘여성의 사회화’가 강조되고 있는 지금, 성년기의 대학생교육이 별다른 특징 없이 과거의 전통에 매달려 여학생만으로 분리, 교육된다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산업사회에서 급속히 진행되는 사회변동과 학교교육의 한계를 인식하여 최근에는 평생교육에 입각한 여성들의 사회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교육은 문화생활 및 여가선용 수준의 일반교양적인 내용에서부터 준학교교육(準學校敎育) 및 전문지식의 습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준학교형태의 교육기관으로는 공민학교·고등공민학교·기술학교·고등기술학교·방송통신고등학교·방송통신대학·산업체부설학교 등이 있다. 정규학교의 형태는 갖추지 않고 비교적 단기간에 훈련을 시키는 기술 및 직업교육기관으로는 청소년직업학교와 직업훈련원, 사설강습소 등이 있다. 이들 준학교교육 및 직업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은 주로 정규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10대 및 20대 초반의 여성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도시지역의 여성사회교육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교양교육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교육을 담당하는 기관들은 여성단체부설 교육시설, 정부산하 복지시설, 언론기관부설 문화센터, 대학의 부속교육시설, 초등학교 및 중등학교 산하 교육시설, 지역사회개발시설, 도서관부설 등 다양한 시설에서 제공되고 있다.

이들 단체들의 교육프로그램은 주로 기술교육, 인구 및 가정생활교육, 어학 및 국민정신교육, 교양강좌, 기타 봉사활동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편 농촌지역에서는 부녀자지도사업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이를 주관하고 있는 관계단체는 보건사회부·농촌진흥청·농협중앙회·가족계획협회 등으로 새마을부녀회·부녀교실·어머니회 등 각종 단체 및 시설을 통하여 여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내용은 주로 일반교양을 높이기 위한 것, 농촌문제를 알기 위한 것, 생활개선·농사기술·가족계획·건강유지법 등 농촌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 등을 가르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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