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1894년 3월 3일 김포 걸포리 304번지에 위치한 유공심의 집에서 예배를 인도했다. 이는 김포의 첫 개신교회인 김포읍교회의 시작이었다. 김포읍교회의 교인들은 1919년 3·1운동 때 양촌면 오라니 장터 만세운동과 군하리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신명학교를 세워 청소년 교육에도 힘썼다. 1994년 김포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김포 최초의 개신교회인 김포읍교회는 1894년 3월 3일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처음 교인들은 고군보·박사라·천덕현·이봉춘·유공심·박성삼·황춘근·유증근 등이었고, 모임장소는 걸포리 304번지에 있는 유공심의 집이었다. 1905년 3월 언더우드가 북변리 264번지 땅 3,500평을 기증하자 교인들은 그 해 9월 700원을 헌금하여 그곳에 33평의 예배당과 15평의 목사관 그리고 12평의 교육관을 건축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김포읍교회 교인들은 3월 22일부터 27일까지 전개된 양촌면 오라니 장터 만세운동과 월곳면 군하리 장터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또 신명학교를 세워 청소년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이 김포읍교회는 일제강점기에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근대교육과 민족운동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김포읍교회는 1980년 예배당을 새롭게 지었고, 1994년에는 김포제일교회로 개명했다. 역대 목회자로는 언더우드 외에 김사필·차재명·김형원·이정봉 목사 등이 시무하였다. 김포읍교회에서 분리된 교회들로는 김포중앙교회, 누산교회, 송마리교회, 개곡교회 등이 있다.
정운락 목사와 13명의 시무장로가 있고, 1980년에 신축된 예배당을 1991년 한 차례 증축하여 집회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