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원(寫字員)의 서체를 바탕으로 주조한 것으로, 누가 언제 처음으로 만들었는지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 않아 활자명을 정식으로 붙이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 글자체와 재료에 의해 ‘필서체철활자’, 그 활자로 찍은 책을 ‘필서체철활자판’ 또는 ‘필서체철활자본’으로 부른다.
이 활자는 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주로 민간의 문집·족보·실기·방목 및 일용제서(日用諸書)를 찍어 내는 데 이용되었다. 그 인본 중 1837년(헌종 3) 인출(印出)의 ≪의회당충의집 義會堂忠義集≫에는 ‘崇禎紀元後四丁酉孟夏校書館活印(숭정기원후4정유맹하교서관활인)’의 인기(印記)만 철활자가 아닌 목활자로 찍혀진 것이 있다. 이것은 소유자 또는 소장자가 뒤에 추인(追印)한 것임을 여실히 시사해 준다.
그리고 1859년(철종 10) 인출의 ≪동래정씨파보 東萊鄭氏波譜≫의 후록(後錄)을 보면 ‘活字主人白琦煥(활자주인 백기환)’의 표시가 있고, 그가 정기증(鄭基曾)의 집에 가서 족보를 찍을 때 주인으로 택자인(擇字人)의 구실을 했음이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활자주인이 백기환이란 민간인이었음을 실증해 주는 자료인 점에서 주목케 한다.
이 활자는 그 뒤 ≪선원속보 璿源續譜≫의 인출에도 사용되었는데 그 인본이 고종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조선 말에 이르러서는 궁내부가 그 활자를 사들였거나 세를 내어 쓰다가 나라의 주권을 잃게 되자 총독부로 그대로 인계된 듯,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민간에서는 이 활자와 닮은 필서체 목활자를 만들어 일제강점기까지 족보와 문집 등을 찍어 주고 삯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철활자와 혼돈하고 그 일부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1930년대까지 계속 인쇄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여기는 이가 있다.
그 예로서 1916년 당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延禧面) 연희리 이세현(李世鉉)이 인쇄한 ≪한양조씨세보 漢陽趙氏世譜≫를 들었는데, 그 책의 형태를 살펴보면 닮게 만든 필서체 목활자를 사용하고 세자(細字)에는 신연활자를 혼용하여 찍어냈음이 역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