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우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판결사, 개성유수, 병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여윤(汝尹)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33년(인조 11)
사망 연도
1710년(숙종 36)
본관
청주(淸州)
주요 관직
대사간·판결사|개성유수|병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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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판결사, 개성유수, 병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여윤(汝尹).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덕급(韓德及)이고, 아버지는 목사 한수원(韓壽遠)이며, 어머니는 이영선(李榮先)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합격, 금오랑(金吾郎)에 천거되었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이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자 180인의 유생들과 더불어 소를 올려 송시열이 무고당했음을 주장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송시열 등이 등용된 뒤 숭릉참봉(崇陵參奉)을 배수받았다. 이어 봉사·직장 등을 역임하고, 1684년 자궁(資窮: 당하관의 최고의 품계)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좌랑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병조좌랑을 거친 뒤 함경도사로 나가게 되었다.

1686년 지평으로 원임대신(原任大臣) 이상진(李尙眞)을 탄핵하고 제궁가(諸宮家) 절수(折受: 임금에게서 자신의 몫으로 땅이나 결세를 떼어 받음.)의 폐단을 극론하는 등 활발한 언론활동을 폈다. 이어 정언·금위종사(禁衛從事) 등을 지낸 뒤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올랐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몰락하고 송시열도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사사되자 그 역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세력이 무너지자 수찬에 재기용된 뒤 교리·응교·집의·사간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어 동부승지·호조참의 등을 거쳐, 한때 회양부사로 부임하였다. 그 뒤 승지·예조참의 등을 지내고 삼척부사에 보임되었다.

1699년 대사간에 올라 시무책 3개 조를 상소하는 등 활약하였다. 그 뒤 철원부사·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거치면서 선정을 베풀었고, 광주에서는 그의 덕망을 기려 주철(鑄鐵)로 된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1701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도내 제궁가가 저지르는 궁방전(宮房田)의 폐단을 지적하는 소를 올렸다. 이어 대사간·판결사 등을 역임했고, 개성유수로 나갔다가 1707년 병조참판에 올랐다.

그 뒤 이조와 공조의 참판, 대사성 등의 벼슬이 내려졌지만, 병을 이유로 모두 물리쳤으며, 향리에서 머무르다가 78세로 졸하였다. 주자학(朱子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고는 하나 대부분이 흩어져 없어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한수재문집(寒水齋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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