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판결사, 개성유수, 병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송시열 등이 등용된 뒤 숭릉참봉(崇陵參奉)을 배수받았다. 이어 봉사·직장 등을 역임하고, 1684년 자궁(資窮)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좌랑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병조좌랑을 거친 뒤 함경도사로 나가게 되었다.
1686년 지평으로 원임대신(原任大臣) 이상진(李尙眞)을 탄핵하고 제궁가(諸宮家) 절수(折受)의 폐단을 극론하는 등 활발한 언론활동을 폈다. 이어 정언·금위종사(禁衛從事) 등을 지낸 뒤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올랐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몰락하고 송시열도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사사되자 그 역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세력이 무너지자 수찬에 재기용된 뒤 교리·응교·집의·사간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어 동부승지·호조참의 등을 거쳐, 한때 회양부사로 부임하였다. 그 뒤 승지·예조참의 등을 지내고 삼척부사에 보임되었다.
1699년 대사간에 올라 시무책 3개 조를 상소하는 등 활약하였다. 그 뒤 철원부사·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거치면서 선정을 베풀었고, 광주에서는 그의 덕망을 기려 주철(鑄鐵)로 된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1701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도내 제궁가가 저지르는 궁방전(宮房田)의 폐단을 지적하는 소를 올렸다. 이어 대사간·판결사 등을 역임했고, 개성유수로 나갔다가 1707년 병조참판에 올랐다.
그 뒤 이조와 공조의 참판, 대사성 등의 벼슬이 내려졌지만, 병을 이유로 모두 물리쳤으며, 향리에서 머무르다가 78세로 졸하였다. 주자학(朱子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고는 하나 대부분이 흩어져 없어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한수재문집(寒水齋文集)』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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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조선 시대에, 관리들의 정규적인 진급 상한선이었던 당하관의 최고 위계. 또는 그 위계에 오르던 일. 정삼품 하계를 이른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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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임금에게서 자신의 몫으로 땅이나 결세를 떼어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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