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단주(湍州). 광록소경(光祿少卿) 한총례(韓聰禮)의 아들이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광종 때 15세로 광문원(光文院)의 서생(書生)이 되었고, 뒤이어 승사랑(承事郎)이 되었다가 내승지(內承旨)를 거쳐 내의승지사인(內議承旨舍人)에 올랐다.
984년(성종 3)에 형관시랑이 되었고, 이어 병관시랑에 올랐다. 990년 송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갔다가 금자광록대부 검교병부상서 겸어사대부(金紫光祿大夫檢校兵部尙書兼御史大夫)에 제수되고 대장경 481함(函) 2,500권과 송 태종이 지어 비장한 「전소요연화심륜(詮逍遙蓮花心輪)」을 가지고 돌아왔다.
어사 예관시랑 판예빈성사(御事禮官侍郎判禮賓省事)가 되어 송나라의 제도를 본떠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실현되자 그 부사(副使)를 거쳐 중추원사가 되었다. 전중감(殿中監)·지예관사(知禮官事)를 거쳐 참지정사 상주국(參知政事上柱國)이 되었다.
목종이 즉위하면서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에 제수되었고, 1001년(목종 4)에 문하시중에 올랐다. 한언공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하여 목종은 본관인 장단을 단주로 승격시키기도 하였다.
다시 전폐(錢幣)를 쓰고 추포(麤布: 거친 배)를 금하여 백성들의 불편이 커지자 그 폐단을 상소하여 전폐를 다주(茶酒)나 식미(食味) 등의 점포에서만 사용하게 하고, 그밖의 교역에서는 토산물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 뒤 개국 후 감수국사(開國侯監修國史)가 되었으며 죽은 뒤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다. 1027년(현종 18)에 목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1033년(덕종 2)에 다시 태부(太傅)가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신(貞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