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춘(景春), 호는 유재(腴齋). 아버지는 한필교(韓弼敎)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증관(朴曾觀)의 딸이다. 관북지방(關北地方)의 태생으로 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도 학문을 위하여 천리를 마다 않고 상로(上蘆)로 임헌회(任憲晦)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1905년에 도신(道臣)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을 받고, 1908년에는 민병석(閔丙奭)의 재차 추천을 받아 순릉참봉(純陵參奉)이 제수되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 필생의 정력을 쏟아 도학(道學)·문장(文章)에 있어 임헌회 문하에서 전우(田愚)와 쌍벽을 이루었다.
관북의 문헌록(文獻錄)·삼강록(三綱錄)을 편집하고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삭방무향(朔方武鄕)으로 낙대 받던 관북지방의 사기를 일신시키는데 큰 몫을 하였고, 학문 연원(淵源)에 있어서는 정주(程朱)를 배우기 위하여는 율우(栗尤)부터 배워야한다고 주장했을 정도로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을 추숭하였다. 저서로는 『유재집(腴齋集)』 5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