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6월과 1991년 11월의 2차례에 걸친 학술발굴조사가 전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실시되어 12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모든 석실들은 남향의 산 경사면을 L자형태로 파낸 토광 안에 반지하식으로 축조되어 있고 봉토는 남아 있지 않다. 석실의 평면형태는 예외 없이 장방형을 취하고 있다. 길이와 너비의 비는 2:1 내외이다. 높이는 파괴로 인해 확언하기 어렵지만 너비와 비슷하거나 약간 낮은 것으로 추정된다.
석실의 축조는 가장 먼저 북벽을 쌓고, 그 양쪽에 이어 동벽과 서벽을 쌓았으며, 맨 마지막으로 남벽과 출입구를 설치하였다. 천장은 91-6호분의 경우 6매의 장대석을 나란히 깔아 놓아 석실과 연도를 덮고 있다.
천장석 사이의 공간은 할석을 끼우거나 회청색 뻘흙을 채워 밀폐시키고 있다. 아울러 6매의 천장석 주변에는 길이 20∼30㎝ 크기의 할석을 토광 어깨선 부분까지 깔아 놓았다. 나머지 석실분의 경우에도 얇은 장대석 몇 장으로 천정을 덮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실 바닥은 판석 · 할석 · 할석+판석 · 생토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 관못이 출토되고 있어 목관이 안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배수시설은 발굴된 12기의 석실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출입시설은 확실한 연도와 묘도를 가진 제6호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 횡구식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단경호 · 개배 등의 토기와 도자 · 관못 등 철기류이다. 모두 6세기대에 해당하며 백제의 대표적인 삼족토기와 무기류가 전혀 보이지 않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석계석실분은 횡구식을 기본으로 하는 구조와 입지 · 군집상황 등 여러 면에 있어서 전남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예이다. 이와 비슷한 구조의 석실분들은 충남과 전북지역에서 흔히 조사되고 있다. 이들 유적들은 대부분 6세기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연대는 전남 지역의 대형 옹관묘와 초기의 대형 석실분들이 소멸하는 시기와 병행된다. 따라서 본 석계석실분들이 대형 옹관묘와 초기 석실분의 뒤를 이어 축조되기 시작하는 단계에 해당함을 말해 주고 있다.
백제가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마한 토착사회를 병합하게 되는 시기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가 있다. 그러나 석계석실분과 같은 백제 석실분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소형 석실분이 기존의 대형 옹관묘와 초기 석실분을 대체해 축조되는 것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